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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뫼 이윤재 선생은, 경상남도 김해(金海) 사람이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을사조약」을 강제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국권회복을위한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김해서 합성학교(合成學校)의 교사가 되어 구국교육운동을 전개했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마산의 창신학교(昌信學校)와 의신여학교(義信女學校)에서 국사와 국어를 교육하고 마산의 예수교 청년면려회(靑年勉勵會) 회장과 유년주일학교 교장으로 활동했다. 1919년 평안북도 영변학교(寧邊學校)에서 교사로 재직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이 지방의 3·1운동에 앞장서서 주동적 역할을 하다가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게 피체되어 1919년 7월 31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에 출옥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채호(申采浩) 등 독립운동가들을 만나보고 북경대학(北京大學) 사학과에 입학하여 3년간 수학하고 1924년 3월에 졸업했다. 1924년 9월에 귀국하여 이승훈(李昇薰)이 설립한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에서 교육에 종사했다. 이 시기에 「중국의 새문자」, 「몽고민족의 독립운동」, 「중화민국 의회 소사(小史)」, 「북경대학을 중심으로 한 학계와 정계와의 충돌」, 「경한철(京漢鐵) 종업원 총동맹 파공(罷工)의 전말」, 「호적(胡適)씨의 건설적 문학혁명론」, 「민중혁명화하는 중국의 학생운동」등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1925년에 안창호(安昌浩)가 조직한 민족운동단체인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해 4월부터 협성학교(協成學校)에서 국어와 국사를 담당하여 교육하면서 허무당(虛無黨) 선언서 발표에 관여하였다. 1926년에 「중국극(劇) 발달 소사(小史)」, 「쾌걸 안용복(安龍福)」, 「조선문(朝鮮文)과 어(語)의 강습을 실행하자」 등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1927년 8월에 「조선사람에게는 조선말 사전 한 권도 없음」을 통탄하고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의 동지들과 함께 국어사전 편찬의 준비활동을 시작하였다. 또한 이해에 민족정신과 민족문화의 발굴?보존?계승을 위한 잡지인 『한빛』을 창간하여 편집 겸 발행인으로서 활동하였다. 이 잡지는 「조선 얼굴의 거울, 조선 마음의 거름」이라는 민족사의 자각 위에서 역사, 사회, 전기, 한글 연구논문과 기행문, 수필문 등을 수록하여 민족문화 보급운동을 통해서 독립사상을 고취한 잡지였다. 이해에 「우리의 수양운동」, 「세계사조와 국민문학」, 「세종과 훈민정음」 등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1929년 10월 31일에 한글 기념식을 거행하게 되는 날을 택하여, 조선교육협회간에 모인 각계 유지 108인의 발기로 조선어사전편찬회(朝鮮語辭典編纂會)를 조직하고 국어사전 편찬을 위한 편찬위원회 집행위원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이 해에 사전편찬의 일로 중국 상해에 망명중인 김두봉을 만나러 다녀왔다. 1930년에는 혼란에 빠진 국문법의 확립과 맞춤법의 통일의 위해 권덕규(權悳奎)·최현배(崔鉉培)·김윤경(金允經) 등과 함께 한글맞춤법 통일안 작성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1년에는 종래의 조선어연구회를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로 개칭했으며, 조선어학회에서 베푼 하기(夏期) 한글강습회 일로 전국을 순회하였다. 이해부터 4년간 매년 여름마다 하기한글강습회에 전국 순회강연을 했다. 이해 5월에 『한글철자법 일람표』를 간행했으며, 『성웅 이순신』을 찬술했다. 『성웅 이순신』은 출간되자마자 일제에 의하여 발매금지 당하였다. 1932년에 조선어학회의 기관지로서 『한글』을 간행하고 그 편집 겸 발행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이해에 「터어키의 문자혁명」, 「변격 활용의 예」, 「한글운동의 회고」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1933년 10월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완성하여 발표하고 그 보급운동에 힘썼다. 이해에 「한글 철자법」, 「한글은 어떤 것인가?」, 「모어(母語)운동의 개관」, 「한글 맞춤법 해설」(조선일보 31회 연재)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1934년에는 국학 및 사학자 동지들과 함께 역사 연구단체인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창립하는데 참가하고, 11월에 기관지 『진단학보(震檀學報)』를 발간하는 일에도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1935년 1월에 조선어 표준어사정위원회(朝鮮語標準語査定委員會)를 개최하여 그 책임자로 활동했으며, 1936년에는 그동안 주관해서 정리해 오던 조선어 표준말 사정을 완성하여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발표하였다. 또한 1936년에는 조선어학회 전담으로 사전편찬의 신규사업을 시작하여 상임편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7년 6월에 「수양동우회 사건(修養同友會事件)」으로 일경에 피체되어 1940년 8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형을 받고 상고하여 1941년 11월 17일 고등법원에서 무죄 방면되었다. 그는 또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의 경과 기략」, 「훈민정음의 창정(創定)」, 「세종대왕과 문화사업」, 「조선어 사전편찬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병자수호조규 성립의 전말」, 「성경 철자를 개정하라」등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운동으로 최현배·김윤경 등 동지들과 함께 다시 일경에 피체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다. 1943년 12월 8일 일경의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감방에서 옥사하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