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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 애국지사 추모탑 대한제국 말년인 1910년 8월 29일, 우리는 잔학무도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그러나 한일합방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이 국내외에서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민족대표 33인이 주도하여 독립선언서로써 우리의 정당한 의지를 세계만방에 선포하였다. 이어서 평화적인 독립운동이 2천만 겨레의 가슴과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봄바람처럼 일어나 들불처럼 번졌다. 기장읍내에서 두메인 이곳 정관 사람도 마소가 아닐진대 국권피탈에 가만있으랴. 어찌 선대의 의기와 저 매남산, 솟음산 정기를 져버리랴. 일신과 가문의 안녕만을 바라랴. 여기 뜻있는 몇 분이 앞장서고 따르는 이들 있었으니 1919년 4월 9일 좌천장 3.1독립운동이다. 정관의 지사 다섯 분이 매학리 김종복(金鍾復)의 후원 아래 사랑방 모의를 거듭하였다. 이들은 거사에 목욕재계하고 수십면민과 함께 용수리 조룡산에 올라가 하늘에 빌고 신명을 바치기로 다짐하였다. 거사 장소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인근 장안면 좌천장으로 정하였다. 좌천장날인 이날 아침에 장꾼 속에서 동정을 살폈다. 정오가 지날 즈음 정관 출신 다섯 분이 태극기를 꺼내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니 차츰 6백여 명이 하나로 성난 파도가 되었다. 놀란 왜경과 수비대는 총검으로 진압했으나 만세소리는 더욱 우렁찼다. 밀고 밀리는 가운데 50여 명이 좌천주재소에 연행되기도 하였다. 지사 일행이 좌천에서 정관으로 돌아오면서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니 온 산천도 목이 쉬었다. 그 뒤 일본 경찰은 지사들을 차례로 체포하거나 추적하여 세 분은 옥고를 치르시고, 그 중 두분은 고문의 여독으로 출감 후 요절하시고 한 분은 평생 병고에 시달리셨으며 다른 두 분은 숨어 지내느라 가정이 풍비박산되었다. 우리 정관은 예부터 부지런하고 인심 좋기로 소문이 났을 뿐만 아니라 충효의 고장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나라사랑으로는 세 분의 임란공신과 한 분 임란 순절자를 배출하였다. 이러한 기상과 기개가 이어 내려와 8·15광복 후부터 6·25전쟁 기간의 나라가 어지럽고 전란을 겪는 동안에도 지역과 나라를 지키는데 한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우리 지역이 아담한 신도시로 개발된 것도 선인의 음덕이니 더불어 살기 좋은 땅으로 가꾸어야 한다. 이에 애국지사와 수 많은 민초들의 나라사랑을 기리고 그 숭고한 애국·애향정신을 신도시 정관의 지표로 삼고자 한다. 2012년 12월 정관 애국지사 추모탑 건립추진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