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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계셨다. 기미 1919년 이해는 하늘이 공에게 처음으로 시련을 내리시던 해였다. 이해 3월 1일을 기하여 근역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대한의 백성들은 남녀노소 없이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맨주먹으로 일제의 총칼 앞에 분연히 일어서니 이것이 3.1만세항쟁이다.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른 항쟁은 끝가는 곳을 몰랐고 마침내 만세의 파도는 13일에는 동래성으로 파급되었고 다음달 5일에는 기장읍으로 거세게 물결쳐왔다. 박영준 의사는 내 고장은 내 손으로 의거를 올려야 하겠다는 애국심을 불태우며 이천을 중심으로 서둘러 먼저 뜻있는 청년들과 함께 스스로 앞장을 서 11일 하룻밤 스물 네시간을 만세를 외쳐 시위하여 왜경을 놀라게 하고 일광인의 민족혼과 조국애를 만인 앞에 드러내어 이웃 농어촌에까지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3.1항쟁은 장동 일대로 뻗어갔으니 그 기개 어찌 장하지 않으며 그 정기 어찌 가상하지 않으리! 공은 미구에 이곳 만세 거의 주동으로 검거되어 또다시 시련을 겪게 되니 왜경으로부터 몸서리나는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다. 모진 고문 끝에 살은 터지고 뼈는 부서졌으나 공은 만세항거를 혼자 일로 돌렸으니 그 동지애 어찌 범상한 사람으로 상상이나 할 수 있으랴. 아! 공은 정말 대의 속에서 살다간 의인임이 분명하다. 그 해 6월 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공은 1년의 형을 받자 대의를 천하에 알리기 위해 대구복심원에 공소하였었다. 공은 그 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고 목다리에 의지하여 귀향하였는바 나머지 평생을 모진 후유증으로 신음 속에서 살다가 1943년 58세를 일기로 외로이 세상을 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