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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범학교 재학중인 1940년 11월 30일에 동교의 비밀결사 문예부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문예부는 민족문화존중과 항일의식의 고양을 목적한 결사로서, 부원의 비밀엄수 및 매주 토요일 작품감상, 비판 등의 운동방침을 정하고 1940년 11월말부터 1941년 3월까지 약 9회의 모임을 가졌다. 그런데 부원중에 상급생(8회)이 졸업을 하게됨으로써 그 뒤를 이어 그와 유흥수 등이 중심이 되어 동지를 규합하고 조직을 확대하였다. 그리하여 1941년 2월 15일에 그는 유흥수·권쾌복 등 15명과 함께 당시 대구시 대봉정 소재 그의 하숙집에(유흥수와 동일 하숙) 모여 항일결사 다혁당을 조직하였다. 즉 다혁당은 위의 문예부 및 동교의 다른 비밀결사인 연구회의 항일정신을 계승하여 조직을 확대 개편한 것이다. 그리고 동 결사는 조직을 교내에 국한하지 않고 대외적으로 조직을 확대하여 타교생 및 일반 사회인까지 포섭대상으로 하였다. 따라서 결사의 명칭도 당이라 했으며, 조직으로는 당수·부당수 아래 총무·학술·문예·연구·경기부 등 각 부서를 두었는데 이때 그는 연구부원의 일을 맡았다. 한편 다혁당은 비밀엄수 및 절대복종, 주2회 회합과 하급생지도 등을 당규약으로 정하고, 1941년 3월부터 동년 5월까지 세차례 모임을 가져 당의 활동상황과 조직확대에 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민족차별교육에 반대하여 동교내 연습과 학생(주로 일본인)과 심상과 학생(대부분 조선인)에 대한 차별대우를 철폐시키는 방안도 토의하였다. 그런데 1941년 7월,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경의 손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도 일경에 피체되었으며, 그후 2년여 동안 미결상태로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11월에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