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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1월에 을사조약이 늑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비분강개하여 의병대장 정용기와 더불어 의병을 일으킬 것을 상의하여 이듬해 1906년 4월에 동대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 즈음 정용기 의병장이 우각지역에서 적군에 의해 체포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자신도 함께 체포당하기를 청할 만큼 동지에 대한 의리를 중히 여기는 인물이었다. 그 후 휘하의 의병들을 인솔하고 주왕산으로 들어가 활약하고 있던 중 이경구가 약곡에서 일본군과의 접전에 실패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의병진을 이끌고 약곡으로 나아가 이경구를 고무 격려하면서 서로 비탄의 눈물을 흘렸다. 이어서 청하를 습격하고자 계획을 세우고 의병부대를 인솔하여 덕성리를 거쳐 진격하던 중 돌연히 일본군이 공격을 단행함에 이를 맞아 의병들을 독려하며 격전을 펼쳐서 적군 수명을 사살하였다. 이튿날 일본군이 북진을 파하였기에 신태호가 이를 추격하였으나 다시 패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듣고 이한구는 의병들에게 정용기는 체포되고 신태호는 패하였음을 들어 일본군에 대해 중과부적임을 주지시키고 훗일을 도모하자는 기약을 하고 의병진을 해산하였다. 1907년 석방되어 재거를 도모하고 있던 정용기와 더불어 재차 의병을 일으켜 청송의 신성에 진영을 옮기던 중 밤중에 일본군이 잠입하여 파수병을 사살하고 의병진으로 돌진하니 적들과 맞서 치열하게 전투하여 적군 3명을 사살하였다. 또한 자양전투에서 일본군의 분파소장을 생포하고 일본군 3명을 사살하였다. 1907년 9월 11일 영천 입암에서 교전하던 중 정용기 등과 더불어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