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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국운이 쇠퇴하여 일제의 강압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영일 영천 두 고을의 접경지인 이 고장에서 당시 고종황제의 시종신이던 정환직선생의 주도아래 뜻있는 어른들이 궐기하여 정용기의사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조국을 수호하려고 의병활동을 전개했으니 이가 바로 민족의 독립사에 길이 빛날 산남창의진이다. 먼저 일군수비대를 격파하고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강릉 원주를 거처 서울로 진격해서 황제를 둘러싸고있는 친일역시들을 몰아내고 이 땅에서 일본세력을 물리친 다는 기본전략을 세우고 서기1907년 정미 이른 봄에 기병하니 사기는 충천해서 단숨에 청하를 습격하고 신청 자양 검단에서 일본수비대를 연파했으나 9월1일 입암전투에서 패배하여 정용기대장을 비롯하여 이한구중군 손영각참모 권규섭좌영등 요인이 순국하는 비운을 당했다. 이 역경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왜적을 물리치겠다는 의사들의 충성은 불타올랐으며 정환직선생은 노구를 무릅쓰고 다시 진용을 정비해서 흥해 의흥 신녕등지에서 잇달아 적을 무찌르며 북상을 시도했으나 불행히도 청하에서 피체되어 영천 남곽에서 순국했다. 3대 대장으로 최세윤의사를 옹립하여 수적으로나 장비면에서 압도하는 적에 대해 고산능령을 거점으로 하는 유격전으로 맞서 이리령에 서 혜인평야에서 때로는 청송 양양등지에서 실로 신출귀몰의 전법으로 적을 괴롭혔으나 끝내 대세를 만회하지 못하고 최대장마저 장수에서 피검되어 순국했다. 다음에는 이세기의사가 남은 의사들을 지휘하여 산애에 피름 뿌리며 수 차례 적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옥중에서 순국하니 회천의 큰뜻 이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