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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의거 기념비 나라가 왜적의 침략을 받고 을사조약과 경술국치를 당하니 온 민족이 통곡하며 비분강개하였다. 기미년 3.1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에 요원의 불길처럼 전개되자 대전마을 남녀노소들은 한마음으로 단합하여 궐기코자 맹세하였다. 송라면 대전리 윤영복선생외 13인과 청하면 오용간선생외 8인이 보경사 서암에서 거사를 숙의하고 그해 3월 22일 오후1시 청하장날 수백군중과 합세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니 그 투쟁의 함성은 그칠줄을 몰랐다. 이날의 독립항쟁은 포항경찰과 흥해헌병대등 일제관헌의 무자비한 무력탄압으로 저지당했고 독립투사 23인 모두가 붙잡혀갔다. 온갖 고문을 당한뒤 윤영복, 윤영만, 이준석, 이영섭, 이준업, 안천동, 안상종, 안덕환, 안화종, 김진순, 김종만 이태하 김진봉 안도용선생등은 대구형무소에서 오랜 옥고를 치루었다. 송라대표14인이 체포되자 대전마을 주민들은 3월 27일 다시 두곡숲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드높이 불렀다. 포악한 일제경찰이 충검으로 압박하니 80여호이던 가구수가 50여호로 줄어들었다. 옥고를 마친 님들은 대전리를 중심으로 청년회를 조직하여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으며 항일운동을 계속했으나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날로 심해질매 윤영복 이준업선생은 만주로 망명하였고 이준석선생은 경북 달성군 가창에서 각기 항일운동을 계속하시다가 순절하셨다. 민들의 나라를 향한 충절이 이처럼 우뚝하니 윤영복 이준석선생에게는 건국공로포장이 내려졌다. 대전리 주민의 드높은 애국심에 영일군 향지는 님들의 고귀한 마을을 3.1만세촌이라 적었다. 님들의 고귀한 행적을 어찌 한조각 돌에다 새길수 있으리요마는 의사 14인을 추모하고 대전리 주민의 애국충절을 후세에 길이 알리고자 영일군민이 온 뜻과 정성을 다해 여기 삼가 작은돌을 세우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