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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께 상주하니 장사랑 참봉이 제수되었다. 비 밀양박씨 사이에 아들 넷을 두니 상일 상호 상현 상희이다. 선생은 태암공의 차남으로 1876년 광무 10년 병자 5월 20일 기계 오도에서 출생하시니 골격이 준수하고 의용이 헌앙하며 경사에 전통하여 항상 대의명분을 앞세워 忠則盡命(충즉진명)하고 孝則竭力(효즉갈력)하는 가훈을 이어받아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자서하고 학문에 전념하던 중 1905년 을사위약이 늑결되고 왜병이 우리 강토를 활보하자 선생은 29세의 젊은 나이로 구국 안민을 위한 충지의 일념으로 잃어버린 국권을 찾기 위해 창의할 것을 친전에 고하고 당시 의진을 모집 중이던 영천 정환직 정용기 대장을 탐방하여 의진 결성을 모의한 후 1906년 5월 영덕 청하 흥해 등 동해 연안에 활거하는 왜병을 토벌하기 위하여 정용기 대장은 영천에서 모병하고 선생은 경주 기계등지에서 동지를 규합하여 양웅이 기계구지 안국사에서 합류 의진을 인솔 출정하니 당시 선생은 산남의진의 참모장으로 군수조달을 책임지고 각처에서 모집한 화총 80정과 군량미 2백석을 송진하니 의병들의 사기가 충천하여 청송과 직보 등지를 공략하여 많은 전과를 남겼다. 여세를 몰아 신녕 의성을 공격하하고 다시 남하하여 동해안으로 진격하자 왜병이 죽장 입암에서 잠복중이다가 의진과 접전하여 혈전을 거듭한 결과 정대장은 전사하고 의병은 크게 패하였다. 선생은 전세가 불리함을 알고 의진을 지휘 대열을 재정비하니 잔여병은 수 십 인에 불과하였다. 철군하여 다음을 기약하고 동지를 규합 보현산에 퇴진하고 있을 당시 선생은 친상을 당하여도 집상치 못하고 사력을 다하여 동해안으로 진군하다가 영덕 주방 전투에서 선생은 크게 부상 당하고 정환직 대장은 왜병에게 체포되니 부상당한 몸으로 단독 잔여병을 진두지휘하여 항쟁하였으나 동지들은 크게 부상 당하고 전멸 상태였다. 같은 해 10월에 선생이 은신 중 흥해시장에서 왜헌에게 체포되어 포항으로 압송 옥고 중 1908년 2월 감옥에서 탈옥하여 관동지방에서 숨어 살면서 의병 재규합을 모책하고 백남억 김태환 동지들과 죽장 보현산에 출병을 꾀하다가 왜헌에 탈로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상처를 입고 신음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아픈 몸을 이끌고 고향에 돌아오니 가문은 황폐하고 친상은 탈상한지 이미 오래되었다. 청천백일은 옛처럼 비추건만 부모님께 불효한 죄 씻을 길이 없어라 해뜨는 비학산과 달지는 약동지를 향해 소리쳐도 숙초에 잠드신 그 은혜 갚으오리요.일생을 조국 광복과 민족생존을 위해 몸 바쳐 싸우시다 1949년 4월 25일 타계하시니 향년이 74세이다. 배는 곡부공씨 진주강씨 월성이씨이며 슬하에 1남 5녀를 두니 남은 호연이요, 여는 손진환 김종섭 윤응모 손수용 허동섭이다. 손은 2남 3녀로 손남은 의몽 의영이요, 손녀는 이종국 손상익 최석호이며 외손은 손진환의 아들 사익 중익 삼익 유익이요, 김종섭의 아들 공산 윤응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