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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를 찾아 정처없이 집을 떠났다. 그로부터는 오로지 조국과 민족을 위한 일편단심으로 고되고 험한 형극의 외길이 연속될 뿐이었으나 원수를 노려보며 서릿발 치는 적개심은 갈수록 더욱 서슬이 푸르렀다. 마침내 각지에서 의병이 벌떼처럼 일러날제 공은 경기도 가평에서 박덕삼 의병진에 들어갔으니 그해가 1906년 3월이요, 공의 나이는 당년 31세였다. 그 후로는 줄곧 서울 근교인 양평 광주 양주 포천 등 경기도 일원을 비롯 강원도의 춘천 홍주 양구 등 지역을 거점으로 하여 연이어 왜적과 혈전을 거듭하다가 1907년 12월 7일에는 춘천과 양구 접경인 추곡에서 패전하여 그만 파진되고 말았다. 공은 다시 잔병을 모아 윤태훈 의진에 합류하여 항전을 계속했으나 그 익년인 1908년 2월 하순에는 홍주전투에서 불리하여 세궁역진한 끝에 사로잡혀 그해 9월 19일에 경성지방재판소에서 7년 극형에 처해졌으니 공은 그 후 영영 다시 도라오지 못하였다. 아, 하늘은 끝내 이 나라를 버렸으며 의사도 함게 앗아가고 말았도다. 왜적들의 잔학무도한 박해는 그 유가족들도 그대로 두지를 않았다. 그로 인하여 장자를 잃은 그 부친 관문은 홀로된 그 자부 능성구씨 모자와 차자 응진의 가솔까지 동반해서 중국으로 건너갔으나 광복 후에는 겨우 공의 질부 선영남씨 모자만이 천진으로부터 귀국하여 그 맏이인 회진 「재중」이 공의 독자 기복의 후로 입계하였고 증손에 ○ 「태진」과 현 「태우」이 있으며 현손에는 원욱이 있다. 1990년 광복절에 국가는 공의 충절을 기려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고 이어서 그 체취가 서린 이곳에 이 비를 세워 그 넋을 기리고 또 이역만리에서 불귀객이 된 그 유족들에게도 위령탑으로 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