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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선생은 약관의 나이로 분기하여 동지를 규합하여 서울에서 독립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일제 관헌의 무력 탄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좌절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서울 대구 등지의 동지들과 연락하며 재기를 모색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이때에 같은 휘문의숙 출신의 김종길과 보성학교 출신의 송두환과 함께 독립운동의 연락을 위한 비밀장소로 대구 서천에 가옥을 매입하여 동료 최해규를 거주시키고 또한 신의주 노송점에 가옥을 매입하여 송협욱을 거처하게 하여 표면으로는 상업을 경영한다고 표방하면서 이면으로는 독립운동의 연락장소로 삼았다. 1920년 4월에 상해임시정부 및 만주에 있는 독립운동단체를 적극 협력하여 민족의 독립을 도모하였다. 동년 9월에 임시정부가 단일 정부로 통합된 뒤에 군자금 모집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는데 임시정부 재무부장 이시영으로부터 의용단 위임장군 자금모집위원 사형집행서 등을 군정서 김응섭의 주선으로 위촉을 받아서 대구 정동석의 집에 숨겨두고 송두환 김종길 최해규 노기용 정두희 정두규 최윤동 등과 군사 주비단에 가담하여 상해임시정부의 군자금 조달에 힘썼다. 동년 12월에 김종길 김명제와 상의하여 만주 봉천에서 권총 3정과 실탄 3백발을 구입한 뒤 김종규와 같이 경상남도 합천의 부호 정달낙으로부터 군자금을 수령하였다. 또 김종길과 김봉규가 의령군의 부호 남정구에게 군자금을 요구하다 그의 계략에 빠져 경찰에 잡혀서 연행되었는데 도중에 일경 갑비를 사살하고 한국인 순사 손기수에게 중상을 입히고 만주로 탈출한 일로 인하여 일경의 수사가 점차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군위에서 최윤동이 체포됨으로써 모든 활동의 정체가 탄로되어 선생도 여러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에 대구법원에서 불법무기소지와 보안법위반 등의 죄목으로 1년 6월의 선고를 받아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만기가 되어 석방되었다. 1924년 4월에 선생은 출옥한 뒤에 동지들과 연락하며 재기를 모색하였으나 국내 활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해외로 망명할 것을 결심하고 마침내 만주로 건너가서 서로군정서에 참가하여 선배 동지들과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그 후에 북경으로 가서 배천택 김종길과 함께 의열단을 도와 일제 기관의 정보 및 일제의 앞잡이를 처단하는데 주력하며 동분서주하였다. 1926년 3월에 선생은 상해로 건너가서 김섭응을 만나 임시정부군무부에 들어가 연락업무를 행하기 위하여 중국의 여러 곳을 왕래하였다. 1932년에 애국단의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행한 의거로 인하여 임시정부가 절강으로 옮긴 뒤에는 임시정부의 밀령을 받고 군자금 모집의 사명을 띠고 비밀리에 입국하였다. 이때에 국내의 경계가 삼엄하여 감시를 피해 경기 및 강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