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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율무역을 위장한 여권을 얻어가지고 북경에 들어가서 심산과 초대면하였는데 심산은 일견하고 지기로 알았다. 동거 반년에 해외투쟁과 중국사정도 알았다, 그때 임정은 로서아정부로부터 200만원의 차관이 약속되어서 우선받은 30만원을 가지고 중국에 있는 독립단체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자는데 대하여 일천과 심산은 그것보다도 송화강 연안 및 장가구 부근에 있는 황무지 백만평을 개척하여서 교포들의 생활안정을 도모하고 청년훈련을 시켜서 둔전병제도를 모방하여 서서히 운동을 전개함이 좋은 방책이라고 이 회의에 반대 불참하였다. 북경을 떠나 국내에 도라와서 지기를 규합하여 유림부호를 상대로 개간비 20만원 모금에 착수하였다. 손후익 이종음 송영우 김화직 등과 같이 안동 봉화 영주 성주 울산 양산 동래 등지에서 모금을 하였다. 선생은 재정부장책으로 회유 혹은 권총으로 위협하여 600원이란 거액을 모금하여 심산에게 수교하였다 이 사실이 일경에 발각되어서 심산은 상해에서 체포되고 동지들이 속속 검거되었다. 선생은 자택에서 1년여를 은거하다가 다시 해외로 도피차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평북 백마역에서 하차하여 도보로 안동현을 거처 봉천까지 가서 천애 이역에서 ○○풍상을 다하고 국내에 돌아오자 즉시 체포되어서 왜경의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옥중에서 발병하여 가석방은 되었으나 거주를 대구에 제한받고 고독한 여관에서 신음하다가 병자 정월 10일에 향년 41세로 운명하니 하늘이 슬퍼하고 땅이 슬퍼하지 않었을까. 유해는 대구성 서누 누총중에서 성풍혈우 30성상을 적막하게 지내왔다. 공자의 말씀에 구생하기를 위하여 해의함이 없고 살신하여 성인함은 있다 하였으니 선생은 살신성인하였다 하여도 과언은 안일 것이다. 오천씨의 문헌을 고찰하면 영양공의 충직과 포은 선생의 대절은 수세의 귀감이라 후손에 이 의사가 났음은 실로 우연안 일이 아니고 전통적이라 하겠다. 가산을 탕진하여 독립운동에 받치고 유족들은 여지없이 영어되고 있으니 이 어찌 식자인으로서 장탄식을 금할 수 있을까. 선생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조력을 한 그의 백형 을기 족제 찬기의 희생도 잊을 수 없다. 유민에게 보낸 선생의 서중에 유비상지인연후에 유비상지사하고 유비상지사연후에 유비상지공이라 하였으니 이 편언을 보아도 그 사상 그 포부를 알 수가 있다. 오매불망하든 조국독립은 되었으나 산하반현의 비극이 가시지 않았으니 그 어찌 삼○할 바가 안일까 지방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