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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여관과 상점을 설치하여 의군부 간부이던 신채호 양기탁 이윤재 김좌진 손일민 제씨에게 국내외 연락기관사무를 맞기시고 이시영 김대락 이상용 제씨와 협의하여 남만주 길림성 이차구와 북만주 대덕장에 군관학교를 설립하셨다. 서기 1912년 대구에서 상덕태상회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의 연락기관을 정하였다. 서기 1913년 14년 양년은 수차 중국에 가서 왜적의 침략과 한국독립에 대한 사관양성을 호소하고 손중산 선생에게 황포군관학교내에 한국군 교육부를 설피하여주기를 간청하여 승락을 얻고 동삼성장 장작림을 누차 방문하여 한국군 군사기지 사용승락을 받고 노백린 홍범도에게 군사참모와 총장을 위탁하였다. 서기 1915년 가을 대구 달성공원에서 시회를 가칭하고 구 한국의병장령 기타 애국지사 수백명을 회홥하여 광복회를 조직하고 총사령직에 추댁되였다. 회규는 총군사식으로 제정되었으며 8도에 지부를 설치하고 만주에는 본회와 유사한 기구를 설치하고 본회의 부사령이 전담하기로 하였으며 초에 이석대씨가 부사령에 임명되었다가 순사후 김좌진이 후임하였는대 김좌진과 박의사는 의형제간이였다. 광복회는 독립자금모집과 군관양성을 획책하고 일인고관암살및 친일반역분자처단을 계속하여 무력으로서 국난회복을 도모함을 주목적으로 하였다. 서기 1916년 중국 상해에 가서 무기를 다수 구입하고 귀로 만주 각지에서 동지요인과 협의하여 5인조 결사대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귁국후 총포대약법위반죌 검거되여 김좌진 정운일 최준명 김진우 최병규 정인영 홍우일 제씨와 함께 6개월만에 출감하셨다. 그후 더욱 일치단결하여 군자금모집과 반역자처단을 계속하는 동시에 동지 우재용 권녕만씨로 하여금 경주 광명리 노상에서 대구로 수송하는 영덕 영일 경주 3군 세 금 8700원을 압수하여 군자금에 충당하고 일변 친일이적자들을 동지 채기중 금한종 유창순 장두환 제씨를 시켜 처단하고 광복운동을 계속하든중 불행히 서기 1917년 12월 20일 광복회의 비밀이 탄로되어 왜경 수백명에게 포위 검거되어 공주감옥에 수감되었는데 동지 수천명이 관련 체포되었으나 선생은 총책임을 단독부담하시고 서울과 대구로 이감되어 만4년간 혹독한 악형을 당하시다가 서기 1921년 8월 11일 향년 38세를 일기로 동지 김한종 채기중씨와 함께 원통하게 교수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