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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3일과 5일에 일어난 울산 병영 3.1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을 서울 유학중이던 한명조와 이영호로부터 전해들은 병영 청년회 간부들이 3월 3일 박영하의 집에서 궐기를 결의하고 거사를 준비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4월 4일 오전 9시 청년회 회원들은 일신학교(현 병영초등학교) 교정에 모여 학생들을 합류하게 한 후 축구공을 높아 차 올리는 신호로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수백 명이 이에 동참하였으며, 14명이 일본경찰에 붙잡혀 울산 본서로 호송되었다. 4월 5일에는 전일의 거사가 널리 알려져 수천 명의 군중들이 아침부터 일신학교 부근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주동자가 체포되어 강력히 저항하는 군중들에게 일본경찰은 무차별 발포를 했다. 이때 엄준, 문성초, 주사문, 김응룡이 현장에서 숨지고 많은 사람들이 중경상을 입었다. 40여명이 검거되었고, 시신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동지들의 손으로 이곳 황방산에 가매장 되었다. 형무소에서 돌아온 그들은 기미계(己未契를) 만들어 4열사의 넋을 달래기 위해 매년 비밀리에 제사를 모셔오다가 1955년 삼일사(三一祠)를 세우고 삼일사 봉제회를 만들었으며, 현재까지 그 뜻을 받들어 오고 있다. 또한 삼일사 봉제회는 2000년부터 매년 4월 이 곳 황방산에서 순국 4열사의 혼을 위로하는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1919년 4월 일제에 항거하다 순국하신 4열사(엄준, 문성초, 주사문, 김응룡)의 뜻을 기리고 나라사랑 정신을 후손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이 추모비를 세웁니다. 2016년 2월 울산광역시 중구청장 참고문헌 : 「광복 다시 찾은 빛」 (울산박물관, 2015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