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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문 선생의 묘 서진문 선생(1901~1928)은 울산광역시 동구 일산동 209번지에서 아버지 서장식과 어머니 류남연 사이의 5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성장 후 일산사립 보성학교에서 인재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선생은 이 학교에서 민족의식 교육에 치중하다가 여러 번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많은 고초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여자 야학회를 만들어 근대 여성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간 선생은 1926년 가나가와현(神奈川県) 조선노동조합의 집행위원과 서무부장을 지냈으며, 1928년 5월 재일본 조선노동총연맹 중앙위원 심사위원으로 재일 조선 노동자들의 권익 옹호에 헌신하였다. 그 후 1928년 11월 10일 히로히토(裕仁)의 어대전(御大典) 행사를 앞두고 일본 전국에 걸친 예비검속에 의해 1928년 10월 25일 체포되었다. 선생은 요코하마(横浜)의 고또부끼(壽)지서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결국 빈사 상태가 되어 그 해 11월 16일 석방되었으나 다음날인 17일 일본에서 28세의 젊은 나이에 서거했다. 선생의 장례식은 11월 21일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의 오열속에 전일본 노동조합장으로 엄숙히 거행되었다. 선생의 유골은 이듬해 1929년 1월 3일 가족들에 의해 고향 일산동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 해 1월 12일 면민장(面民葬)으로 거행하고 화정산(현 화정공원)에 모시게 되었다. 혈육으로는 유일하게 외동딸 정자를 남기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