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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문씨 동래 성안공파 추모공원 바로 옆 양산시 동면 법기리 500 김외득 선생 행적비를 찾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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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보성중학교(普成中學校)에 재학 중이던 그는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여 1930년 3월 만세시위운동을 폈다. 그는 이일로 인하여 학교를 퇴학당한 후 귀향하여 1931년 4월에 조직된 양산농민조합(梁山農民組合)에 가입, 소년부원(少年部員)으로 활동하였다. 양산농민조합은 1932년 2월 20일 양산사회단체회관에서 제3회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첫째, 소작권 영구확립, 둘째, 지세공과금(地稅公課金)의 지주부담, 셋째, 소작료 4할납부 등을 결의하였으나 일경은 신영업(申榮業)을 비롯한 16명의 조합간부들을 체포하였다. 그는 김장호(金章浩)와 함께 피체된 조합간부들을 구출할 것을 결의하고 최학윤(崔學潤)·최해금(崔海金)·최달수(崔達守)·김태근(金泰根) 등 3백여명의 조합원들을 주도하여 동년 3월 16일 양산경찰서에서 조합간부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운동을 폈다. 이때 일경의 발포로 인하여 조합원 윤복이(尹福伊)가 순국하였다. 일단 양산협동조합 사무소로 피신한 조합원들은 다시 피체된 조합간부들을 호송하는 도중 구출할 계획을 세웠으나 일경의 급습을 받아 그를 비롯한 170여명의 조합원이 피체되었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1932년 10월 13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죄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