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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개국백(南平開國伯)이신 시조 무성공(무성은 시호 휘는 다성)께서 남평당에 나옵신지 1500년을 헤아리고 24세에 해당되시는 강성군 할아버지(시호 충선 휘는 익점)께서는 고려 공신으로 멀리 원나라(元)에 사신가셨다가 목화씨를 들여와 이 땅에 널리 펴기 시작하신 지 605년 26세 할아버지(휘는 혁)께서 역시 고려조에 진사로 행직하시다가 동래에 자리잡으신 것도 아득한 고려말의 일이시다. 이로부터 남평문씨 동래파는 동래를 중심으로 세세손손 자손이 번창하고 우애가 돈독하여 오늘의 벌족을 이루었으니 이는 모두 시조할아버지를 위시한 역대 선조들의 그윽한 덕이라 하겠도다. 그러나 오랜 세월의 흐름과 임진왜란 등 겹친 병화로 말미암아 망실된 무덤들이 없지 않으매 동래의 처음 입향하신 할아버지(휘는 혁)는 사직동에 석단으로 모시고 동성재(東城齋)를 세워 그 음덕을 추모 배향해 오던 바 다시는 이와 같은 실묘의 한이 없게하기 위하여 이곳에 문중묘지를 마련하여 32세이신 할아버지(휘는 진생)를 비롯한 41기의 분묘를 1968년 6월 6일 함께 옮겨 모시고 새로운 선영으로 삼아 후손도 여기에 들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