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追慕碑(추모비) 일성(一聲) 文時煥公(문시환공)은 1897년 8월 12일 동래에서 始祖(시조) 多省公(다성공)의 31세로 태어나 동래 동명학교(현, 동래고교)에서 수학하던 중 조국이 경술국치(庚戌國恥)의 수모를 당하자 중국 상해로 건너가시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시는 한편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모스크바대학에서 수학하셨는가 하면 의열단의 일원으로서 항일 구국의 의지를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공은 1923년 겨울 국내에 잠입하셨다가 체포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르셨을 뿐 아니라 일제에 의해 형무소로 끌려가는 호송차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신 구국충정의 애국지사이십니다. 광복 후 제헌국회의원, 제3대 경상남도도지사, 미8군사령관 워커 장군의 특별고문 등으로 조국 재건을 위해 활약하셨으며 흥아타이어공업(주)를 창립 운영하시면서 조국의 근대화, 산업화에도 선구자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이러한 공로로 1969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으셨고, 1973년 11월 11일 이곳에 잠드셨으며, 1995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으시니 '나라없는 설움보다 아픈 설름은 없다' 던 공의 유언은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공의 서거 26주기를 맞아 문중의 뜻으로 여기 기산제에 추모비를 세우니 지나는 이는 모두 공께서 걸으신 길에 머리 숙이고 공의 뜻을 마음에 기릴 것입니다. 공이시여 평안히 쉬옵소서. 1999년 9월 24일 남평문씨 동래성 안파 문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