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쳐 신화예술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상해로 떠날 적에 아버님이 주신 한 폭의 태극기와 한 주머니의 모국 흙을 종신토록 소중히 간직하였다. 위 대학을 고학으로 졸업한 후 1933년 가을부터 중국 대륙을 전전하면서 항일군가를 작곡하기 시작하고 '여나' '아리랑' 등 수많은 가극작품을 창작 연출 주연하여 항왜의식을 고취하였으며 때로는 김구 주석과 장개석 위원장을 초대하여 격찬을 받기도 하였다. 한편 39년 6월에 중국 서북집단군 정치부 공작대장에 임명되어 산서 중조산에 침입한 일본군 소탕전에 참전하고 이어 전사공작 간부훈련단 교관을 역임하면서 '한국의 용사' '동포는 우리를 기다린다' 등의 연극을 공연하였다. 40년 9월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교관으로 임명되어 44년 10월에는 광복군 제2지대 선전대장에 취임하였으며 익년 8월에 한미합작 OSS특공작전의 훈련을 이수한 후 국내 침투작전 대기 중 8.15광복을 맞았다. 실로 춘풍추우 10성상동안 풍찬노숙의 연속이었다. 48년 9월 광복의 감격을 안고 환국한 후 자유아동극장 및 색동야학원을 설립하여 걸식아동을 교화하였으며 초대 부산 문화극장과 부산대학교 문리대교수 및 광복회 부산지회장을 역임하면서 고장문화창달과 영재의 교육 및 불우한 독립유공자 돕기에 심혈을 기울렸으며 정년퇴임 후에도 시내 각 대학에서 젊은이 못지않은 정열과 낭만으로 여생을 보내다가 1996년 6월 1일 향년 87세로 서거하셨다. 정부에서는 대통령표창과 국민훈장 목련장 및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고 지금 자녀들이 정성을 모아 묘비를 세우니 선생의 위업에 보답하는 길이라 하겠다. 선생의 티없는 맑은 인품 굽히지 않는 지조 변함없는 나라사랑은 겨레 역사와 더불어 영원하리라. 1996년 12월 6일 광복회 부산지회장 인천 이태길 삼가 짓고 부산시문화재전문위원 창녕 조영조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