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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재학 중에는 인품이 출중하여 재경 팔도 유학생회 회장을 맡아있으면서 학생들 대표하여 33인의 한 분이신 박희도 이갑성 등과 협심하여 3.1운동을 직접 계획 지휘하였으며 파고다공원에 운집한 수천 군중 앞에서 민족대표를 대신하여 학생대표인 선생께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셨다고 전한다. 이날의 시위로 왜경에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며 주동자 중 최고형을 받아 옥고를 치르시고 형기를 마친 후 부산 영주동과 대청동에서 동산병원을 개원하고 왜경의 눈을 피해 의사 신분을 이용하여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듯 수많은 애국지사를 돌보았으며 부산을 중심으로 경남 일원의 독립운동자금이 영주 동산병원에서 나왔음이 확인되었다. 꿈에 그리던 해방이 찾아오자 선생께서는 군정청 경상남도지사 고문과 해외 귀환 동포 후원회장을 맡아 헐벗고 굶주리는 동포를 극진히 보살피며 구호하는데 헌신하셨다. 하지만 해방을 맞은 조국은 극한적인 사상의 대립과 갈등으로 민족의 분열을 가져왔고 이를 틈 탄 친일 잔당들은 저들의 호신책으로 수많은 항일애국지사를 공산주의자라는 오명으로 일제보다 더 심한 핍박을 주었고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시며 민족주의자이신 선생 또한 저들의 마수에 희생되니 하늘을 우러러 통탄할 뿐이로다. 비록 선생은 가셨지만 선생에 대한 3.1운동의 재판기록과 항일운동의 사실이 입증되어 조국이 해방된 지 45년이 지난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아 독립운동의 업적을 되찾고 지난날의 오욕이 깨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