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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의학전문학교 재학 중 재경유학생회 회장으로 학생대표가 되어 3·1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그의 거사준비를 위한 활동은 이미 1919년 1월부터 시작되었다. 재경성의학전문학교 대표인 주종선(朱鐘宣)·이공후(李公厚)·김문벽(金文壁) 등과 같이 민족대표 33인 중 한사람인 박희도(朴熙道)로부터 독립운동을 위한 학생들의 역할을 전해 듣고 각급학교 대표들과의 모임을 통하여 학생들의 결속을 공고히 하였고, 2월에는 역시 민족대표 중 한사람인 이갑성(李甲成)으로부터 해외독립운동에 관한 정세를 듣고 학생대표들과 회합하여 만세시위운동 계획을 세웠다. 드디어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서울시내 전역에 배포할 수 있도록 준비를 완료하고 탑동(塔洞)공원에 모인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고, 거리를 뛰쳐 나와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이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자료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