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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서병희 약사 본관은 달성서시며 부 서병권과 모 청주한시의 장남으로 1867년 달성서씨 감찰공파 20세손으로 양산군 상북면 좌삼마을에서 출생하였다. 본명은 병희 족보상 이름은 영호 자는 경운이다. 14세까지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하시고 1851년 순흥안씨 모열과 결혼하였다. 1887년부터 1891년까지 서울에서 한의학을 수학하고서 귀향하여 1902년 향리에서 한의업을 개업운영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고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한탄하다 일신의 영일과 가문의 안위를 초개같이 접고 오직 구국충정의 일념과 일사각오로 일제에 투쟁할것을 결심하고 1907년 2월 11일 홀연히 상경하여 그해 음력10월 의병장 허위의 부대에 참여하여 임진강유역에서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댜. 동년 12월엔 허위부대 소속으로 전국 "십삼도창의군" 결성에 참여하고 1908년(양) 1월 "서울진공작전"에 결사대 300명 선봉장으로 활약했으나 일본군의 막강한 화력과 선제공격으로 폐퇴하였다. 이후 허위대장으로부터 경상도에 내려가 거사하라는 밀령을 받고 1908년(양) 1월 31일 허위부대해산병 51명을 인솔하여 경주 군산 내면 아미산에 입산하여 동군 거주 윤정의 의병부대와 함께 병력 68명 화승총 58정 양총2정 군도 1진으로 부대를 재편하고 일인 고리대금 업자를 처단하고 매국행위 친일파를 응징하며 일제 관공서에 "격문"을 보내 일본의 침략을 당당하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철수할것을 경고하였다. 1909년 음력 10월 11일 오후7시 경남 창원부 내서면 사율리에서 밀고를 받고 출동한 일순사 2명에 체포되어 의령지구 수비대장 안전무언에게 인계되어 재판절차도 없이 고문으로 순국하였다. 대한민국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