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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향리인 양산에서 한의업을 경영하다가 광무황제가 강제퇴위되고 군대해산이 이루어진 다음인 1907년 음력 11월에 임진·한탄강 유역에서 활동하던 의병장 허위의 휘하에 들어갔다. 그 뒤 허위로부터 영남으로 내려가 거사하라는 명령을 받고 1907년 12월 28일 해산군인 51명을 거느리고 영남으로 내려와 윤정의와 제휴, 의병항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1908년 5월 윤정의와 결별한 뒤에는 향리인 양산 일대에서 독자적으로 활동, 양산군 하서면, 하북면 등지에서 일군수비대와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 뒤 1908년 8월 18일 경남 산청으로 옮겨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던 박동의 의병자의 휘하에 들어가 그 부장이 되어 이학로와 함께 산청군 두량곡에서 일군수비대와 교전, 큰 전과를 거두었다. 그 뒤 이학로 부대의 향도관으로 있다가 1909년 2월 독립하여 의병장이 된 이후 경상남도 전역을 전전하며 전과를 올렸다. 서병희 의병부대의 주요진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의병장 : 서병희 소모장 : 이성로 도포장 : 이춘실 파수장 : 이국선 연습장 : 김재익 일초십장 : 최덕수 삼초십장 : 정한수 이와 같이 부대를 편성한 뒤 함안군 군북면의 일군수비대와 경찰서에 각성을 촉구하는 격문을 발송하였으며, 같은해 6월 20일에는 칠원 주재소를 습격하여 일순사 1명에게 중상을 입히는 한편 군자금 8백냥을 거두기도 하였다. 이어 8월에는 부하의병 5명을 거느리고 창원군 양전면 호라리에 사는 부호 박진사로부터 군자금 30원을 거두었으며, 9월에는 부하 18명을 거느리고 재무주사 1명을 처단하고 11월에는 의령·고성 등지에서 군자금 200원을 모집하고 일상인을 사살하는 등 경남 일대를 전전하며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1909년 10월 11일 창원군 내서면 여율리에서 밀고를받고 출동한 마산주재소 일경 2명에게 피체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