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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오의 독립운동. 박민오(朴玟悟, 1987~1976)는 불교계 독립운동을 주도한 통도사 승려출신으로 3.1운동때 학생대표로 만해와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상해임시정부에서도 활동하였다. 박노영이라은 이름으로 더 알려졌던 박민오는 만해스님과 인연이 깊었으며, 백성욱, 김법린, 신상완, 김상헌 등과 더불어 불교계를 대표할 정도로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1921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미너소타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인 최초로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문학에도 자질이 뛰어나 '동양의 마크 트웨인'이라는 찬사를 받았다고 전한다. 박민오는 1907년부터 1914년까지 통도사에 머물렀고, '옥돌같은 꺠달음'이란 의미의 '민오(玟悟)'도 이때 받은 법명으로 추정된다. 특히 승려였던 그는 전국 불교계의 총궐기를 위해 결성된 전국 불교독립운동의 참을 맡아 중앙학림(동국대 전신)의 3.1운동을 진두지휘하였다. 박민오는 3.1운동 전날 만해가 서을 자택으로 긴급히 불러 서울과 건국 각지 승려및 신도들을 총동원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대책을 논의할 때 참석했을 정도로 만해의 신뢰를 받았다. 1919년 6월 초순부터 「자유신종보」의 제작과 배포등에도 관여하였으며, 독립자금도 모금하였다. 특히 1919년 9월경부터 혁신단 특파원의 임무를 띠고 상해임시정부를 찾아갔다. 때마침 국내에서 혁신단의 독립운동자금 모집등이 탄로나 백초월, 백성욱 등이 체포되었고 박민오는 곧바로 수배 대상으로 떠올랐다. 그는 한동안 임시정부의 일을 도왔지만 임시정부도 재정적 어려움을 겪자 금릉학교를 거처 1921년 8월에 뉴욕으로 건너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