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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경찰서 시위운동 1932년 2월부터 양산농민조합의 활동이 강화되자 더 이상 농민조합의 활동을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양산경찰서는 당시 농민조합 조직선전부장인 이봉재를 비롯하여 16명을 검거하고 구류및 벌금 처분하였다. 양산경찰서의 농님조합원들에 대한 처벌은 사실상 농민조합의 정상적인 활동을 못하도록 하는 조치였다. 이에 양산농민조합 집행위원장이었던 전병건은 김장호와 함께 수감된 인물들을 탈환하기 위해 성서면 최해서와 최학윤의 방에서 계획을 세웠다. 김외득은 양산읍내를 담당하고 한동선, 함성관등은 각 마을 별로 농민을 모으게 하였다. 그 결과 농민조합원과 구류처분을 받은 가족들 약 300여명은 3월 16일 오후 9시 30분에 곤봉을 들고 양산경찰서로 몰려갔다. 경찰서에 도착한 시위군중들은 정문과 뒷문에서 함서을 지르고 돌을 던지면서 경찰서에 진입하여 경관을 폭행하고 구금된 간부 16명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경찰이 쏜 실탄에 맞아 북부동 181번지 주거 농민출신 윤봉기가 사망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