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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장터 만세운동 (1차 의거 1919.3.27) 엄주태(嚴柱泰)는 동래시장에서 벌어진 만세시위에 참가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양산공립보통학교로 가서 전병건(全秉健)과 함께 3월 27일 양산읍 장날을 기하여 선언서를 배부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3월 17일 엄주태와 전병건은 선언서를 양산군청 사환 정주봉(鄭周奉)에게 부탁하여 50매를 등사하였고, 3월 25일에는 정주봉에게 양산군청 등사판을 중부동(中部洞) 엄주태 집으로 옮기게 한 후, 독립선언서 200매와 공약서, 경고문 등을 등사하고 큰 깃발도 만드는 등 시위를 준비하였다. 3월 27일 장날을 맞이하여 장꾼 3,000여 명이 모여 있는 가운데 주동자들은 시장 중앙에서 선언서를 배포한 후 독립만세를 외쳤고 군중들이 적극 호응하였다. 경찰이 해산을 시도하고 주동자를 검거하자, 시위군중은 양산헌병분견소(梁山憲兵分遣所)와 군청으로 몰려가서 항의하였다. 헌병은 실탄을 발사하며 군중에 해산시키려 했으나 해산하기는커녕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사태가 급박해지자 부산헌병분대에서 12명의 군인을 급파하여 시위대와 계속해서 대치하다가, 검거된 주동자들을 석방을 전제로 시위대는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양산헌병분견소는 엄주태를 비롯한 주동자들을 다시 구속하였다. 양산장터 만세운동(2차 의거, 1919.4.1) 3월 27일 양산시장 만세운동에서 주동자들이 재구속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군중들이 다시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검거를 피한 이상환(李相煥)과 류경문(柳敬文) 등이 중심이 되어 4월 1일 오후 2시경 궐기하였다. 2,000여 명의 군중이 운집하여 양산 시가지를 누비며 만세운동을 전개하고 양산헌병 분견소로 진격하여 구속자 석방을 외쳤다, 이 2차 의거에서 이상환, 류경문 등이 검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