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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의 의병전쟁과 서병희(徐丙熙, 1867~1909) 양산 상북면 좌삼리(左森里) 출생으로 1881년(고종 18)까지 한학(漢學)을 수학하고, 1887년에 상경하여 한의학을 배워 양산에서 한의원을 경영하였다. 을사보호조약으로 국운이 기우는 모습에 한탄했던 서병희는 1907년(순종 즉위년) 의병장 허위(許蔿)의 휘하에 들어갔다. 1908년 1월 13도 연합군의 서울탈환 작전에 결사대 300명의 선봉장으로 참여했으나 실패한 후, 허위의 밀지에 따라 영남으로 내려와 의병을 일으켰다. 부대원 51명과 함께 경주 산내면의 윤정의(尹政儀)와 연합하여 병력 68명, 화승총 58정·양총 2정·군도 1진으로 부대를 재편하였다. 이후 서병희는 울산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해 많은 타격을 입혔다. 1908년 3월에는 경주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을 벌였다. 1908년 경상남도 산청으로 이동해 의병장 박동의(朴東儀) 휘하에 들어가 이학로(李學魯)와 함께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을 벌여 큰 피해를 입혔다. 서병희는 1909년 3월에 이학로로부터 독립해 독자적인 부대 편제를 갖추고, 함안, 창원, 진주 등 경상남도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1909년 10월 11일에 체포되었다. 취조 과정에서도 끝까지 부하들의 이름과 잠복지 등을 밝히지 않고 향년 43세로 순국하였다. 국권 상실을 끝까지 막기 위해서 의병활동을 했던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양산시 상북면 수서로 159(좌삼리 97번지)에 그의 생가가 있었으나 현재에는 멸실되고 공터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