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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병희와의 인연, 김병희·김교상 부자의 의병활동 서병희의 고향인 좌삼에서 1㎞ 떨어진 상삼마을에는 김병희(金柄熙)가 살았다. 김병희와 서병희는 16살 차이가 나는데 김병희가 동몽교관으로 후진양성랑 때 어린 시절의 서병희가 인근 마을에 살았기에 배우러 다녔을 것으로 보인다. 그 아들 김교상(金敎相)과는 5살 차이가 나므로 형과 아우로 지냈을 수도 있다. 이런 인연으로 김병희 부자는 서벙희에게 군자금 5천엔을 건넨 바 있다. 서병희가 하북면 성천리에서 일본인을 참살한 사건 후 울산수비대는 의병소탕작전에 나섰다, 그 전부터 양산 천성산 주변 내원사, 웅상 일원에는 서병희의 의병이 있던 곳이라 일본군경의 철저한 수색대상이었다. 김병희가 살았던 상삼마을에는 일본 군경이 변장하여 숨어 있었다. 김병희와 김교상 부자는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포수 수 십명을 상시 고용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잠복한 일본군이 화적떼라고 생각하고 1908년 6월 26일 11시경 교전을 벌였다. 교전은 김교상이 김병희와 함께 자신의 집에 은닉해 둔 총기를 발포하면서 시작되었다. 잠시 후 김교상이 이들이 일본 수비대임을 알고 사격을 중지했으나, 일본군은 관병임을 알고도 고희로 발포한 것이라 하여 김교상 부자를 체포하고 무기를 압수한 후 심문하였다. 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군은 김병희 부자를 보복 고문한 뒤 하북면 성천마을앞 통도사 자비도량 근처의 소나무에 3일간 매단 뒤 처형시켰고, 삼감마을 우동신 노인과 구하스님이 거두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