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源淨潤群生(원정윤군생) '깨끗한 물이 많은 생명체를 윤택하게 한다' 는 말이다. 일제강점기 시기(1910~1945)에 조선총독부 총독을 지낸 마코토의 글씽며 왼편의 세로로 새겨진 子爵 齊藤實(자작 제등실)은 글쓰이인 사이토 마코토의 이름이다.(자작은 작위 명이며 사이토 마코토는 1925년도에 일본왕실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이글은 1932년 법기수원지 댐 완공 시에 석각한 글이다. 사이토 마코토는 일본의 정치가이며 해군대장(1858~1936)으로 1919년에 조선 총독에 취임하여 문화정치를 시행하였고, 1932년 일본의 5.15 사건 후에 내각 총리대신이 되었으며 일제강점기 시기에는 2차례의 조선 총독(3대 1919~27, 5대 1929~31)을 역임했다. 1936년 일본군부의 급진파 청년 장교들에게 친영미파)로 지목되어 암살되었다. 당시 3.1운동을 비롯하여 독립운동이 크게 전개되자 일본은 기존의 조선 통치방법을 '무단정치'에서 유하정책인 '문화정치'로 전환하는 술수를 구상하였다. 이는 허울만 문화정책이고 실제로는 헌병을 경찰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을뿐, 오히려 군 병력을 증각시켰다. 3.1운동과 제1차 세계대전 후 세계를 휩쓴 민족자결주의의 조류에 밀려 한때 문화정치라는 핑계로 기만적인 동화정책을 폈는데, 그 본질은 민족문화를 말살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특히 그들으 식민지 교육정채을 강요하면서 우리 민족문화를 왜곡하고 그들의 문화를 미화시키는 한편, 우리 어문의 사용금지, 일본어사용 강요, 일본식 성명 강요등 그 수법이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악랄하고 야만적이었다. 동화정책이 어떤 형태나 수법으로 행하여지든 간에 지배민족이 그들의 식민지에서 동화정책을 일정 부분 성공한 예는 세계 역사에 들물다. 이 기간을 이용하여 많은 지식인을 변절케 하였고 우민화 정책은 계속되었다. 1919년 9월 2일 사이토 마코토가 조선총독으로 취임하여 남대문역(현 서울역)에 도착할 때 한국의 독립운동가 강우규선생ㅇ 폭탄을 투척하였지만 아쉽게도 사이토 마코토를 처단하지 못하고 그 일행 중에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비록 이 댐이 일본으로부터 강제통치를 받은 시기인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주도하에 건설되었지만 댐 건설을 위해 강제노역을 동원된 우리 선조의 힘으로 건설되었음은 명백하다. 부끄러운 역사이지만 역사는 역사이므로 할 것은 알아야 하며 이 교훈을 바탕으로 우리는 이러한 역사가 두 번 다시는 재현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부국강병에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