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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명치대학교 법과에 입학 법률공부를 하였다. 그는 재학 중 조선유학생학우회를 조직하고 총무로 선임되어 항일투쟁을 하였다. 졸업 후 귀국함과 동시에 1909년에는 백산 안희제 등과 비밀결사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는 한편, 양산(梁山)에 의춘학원을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는 고향에서 만세시위에 적극 가담 활동하고, 압록강을 건너 단신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는 그곳에 모인 독립지사 수십 명과 교류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시영·이동녕·김구·노백린·여운형·신익희 등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고, 이어 초대 재무차장에 선임되어 임정의 재정문제를 해결하는 데 최대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특히 백산상회자금 30만원을 임시정부 군자금으로 헌납함으로써 재정압박을 다소 완화시켰다. 이어 임시정부 상임위원회에서 재무위원장으로 선임되었고, 제2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다시 내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동년 5월에는 구급의연금모집위원이 되어 어려운 임시정부의 재정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하였다. 1920년에는 독립신문사를 주식회사로 확장하고 안창호와 같이 주금모집의 발기인이 되어 홍보활동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1921년 5월에는 국민대표회의기성회를 조직하여 활동했으며, 같은 해 중한국민호조사를 결성, 중국과 같이 공동의 적인 일본을 섬멸할 계획을 수립하고 실천할 것을 결의하였다. 구국의 일념에서 건강을 돌보지 않고 구국투쟁에 헌신하던 그는 상해에서 30세로 요절하였다. 일제의 신문인 조일신문에서도 "형극의 배일 수완가 윤현진의 사(死)"라는 제목 하에 그의 사망은 임시정부의 패망이라고까지 논평할 만큼 그의 위치는 뚜렷하였다. 그는 임정요인들의 애도 속에 국장으로 상해의 정안사외인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