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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재무차장의 임명을 받었다. 그래서 선생은 정부의 재정을 위해서 서소로 고심하던차에 임시정부 국채발행을 안출해서 중국재벌을 상대로 채무의 보장을 협의하였다. 일인즉 호전지망이 있기도 했건 만 진행 도중에 어이없이도 선생은 세상을 떠나버렸다. 선생은 일즉 고향인 양산에서 영재육성으로 의춘학숙을 설립하고 외화배척으로 의춘상행을 창설했었는데 의춘상행은 과연 성적이 놀남직했던지 라 외국상인들이 모두 철거하기까지 되었었다. 그런데 양산의 전설에 양산의 지리는 비자형으로 ? 지라. 양산인사들은 자고로 협의가 잘되지 않는다고 한다. 아니 비자운운은 좀 ??한 풍수설로 ?? 니드래도 아마 협의가 잘되지 않는다는 탄사로 볼수는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선생은 의춘상행을 창설할때 23인의 중역평의원을 선정하는데 전부 각계각층의 유지로서 ?라했었다. 그래서 누구도 열복하지 않는 이가 없엇다. 그리고보니 비자운운은 맛츰내 선생의 홍량을 조석하지 못햇다. 이것은 도무지 선생의 애국일념과 화기만만한 풍도와 아울러 정심한 지략에 매인 것이었다. 생각하건대 선 생은 일즉 일향에서 일국의 경륜을 시수했었고 나아가서는 국가의 대계를 생각한바 있었건만 시운 이 그것을 응해주지 않는 한편 하늘이 또한 선생에게 수명을 빌려주지 않었었다. 선생은 단기 42 25년 임진 9월 20일 경상도 양산군 상북면 소토리에서 비서원 승지공 필은의 2남으로 출생했었고 그 ? 계한 천자는 유시부터 누구나 원대한 촉망을 했던 것이었다. 이?에서 경사를 배웠는데 문필이 숙 성했었고 융희 2년에 구명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남북경 상해 등지로 ?역하고 도라와서는 한숨을 쉬면서 천하사는 가히 해봄직한 것이라 말을 했는데 시년이 18세이었다. 25세에 일본명치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도라와서 경남은행 참사로 경남은행 마산지점장으로 지내면서 고향의 육영사업과 경제부흥에 진췌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상해로 가던 때는 28세이었고 단기 4254년 신유 8월 16일 중국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