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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운동 때에는 경남은행 마산 지점장을 지내면서 고향에 일어난 만세 운동에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일본의 탄압이 심해지자 4월에 상하이로 망명하여 이시영·이동녕·김구·노백린·여운영·신익희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조직하였다. 임시 정부의 초대 재무 차장에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재정 문제 해결에 힘썼으며, 미국 선교사를 통해 고향의 사유 재산 30만 원을 임시 정부에 헌납하였다. 그 후에도 임시 정부의 재무 위원장과 내부 위원 등을 맡아 나라를 위하여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가 1921년 9월 17일 갑작스레 얻은 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선생은 순국하기 전에 "조국이 독립하지 못하면 내 유골을 고향의 선산에 묻지 말며, 내 자녀를 결혼시키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정부는 1962년에 선생에게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상하이 정안사(靜安寺) 외인묘지(지금의 만국공묘)에 안장되었던 선생의 유해는 1995년 6월 23일 대전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