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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고 휘는 용건이시다. 1905년 27세때 칙명 정삼품 김용건 이조참판 승 통정대부 자 광무 9년 6월 일 내부대신 훈1등 이지용 선 이라는 칙령을 받으셨다. 청.일.영.미.소. 5대강국의 각축장이 되었던 그 당시 우리 정국은 일본국의 세력에 못이겨 1905년 광무 9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으니 나라의 실권이 일본국으로 넘어가자 의분을 참지 못한 충신 민영환공 등이 의거와 자결로 항쟁하였으나 국권이 일본국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여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방 조약이 조인되었다. 공은 망국의 한을 품으시고 단신 일본국으로 도일하시어 3년여 년을 조국독립을 위하여 항쟁하시다가 조국이 광복되자 서기 1945년 귀국하시어 노환으로 1945년 2월 14일 오후 7시 10분 고향 집에서 72세를 일기로 타계하시었다. 장지는 양산군 동면 석산리 지당곡 송백등 묘좌에 숙부인 연안인 차복순 여사와 쌍분으로 안장하였는데 시대의 변환으로 1986년 이곳 법기 선영으로 이장하였다. 후사로는 장남 일득 차남 상득 3남 외득을 두셨는데 장차남은 조졸하였고 3남 외득은 1983년 8월 30일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로 대통령포상을 받았으니 아버님의 망국한을 조금이라도 풀어드렸고 손자 넷 손녀 다섯 모두 사회의 중견으로 성장하여 생전에 못 다 이루고 가신 뜻을 아들 손자대에서 소원성취하여 이곳에 선산을 마련하고 명당을 골라 유택을 모시고 상석과 비석을 세워 행적을 후손에게 알리오니 후손들에게 길을 인도하시고 복을 주시며 왕생극락하옵소서 방손 형철 근찬, 방족 임엽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