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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촌 곽경렬 선생은 1901년 9월 17일 전북 김제군 진봉면 심포리에서 곽대수 씨의 3남으로 태어나시니 현풍 곽씨 시조 고려 문하시중 포산군 곽경의 29세손이요 조선조 호조판서 곽량기의 17세손이시다. 선생의 유년기는 우리 민족의 수난이 시작되던 때였으니 1905년 일본의 침략적 강압에 의하여 매국적인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불과 5년 후에 나라가 비참히 망하니 전국 방방곡곡에서 애국지사들이 분연히 일어나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격동기에 자라온 선생은 타고나신 영민한 자질과 남다른 애국애족에 대한 의협심은 많은 사람들의 촉망을 받았다. 소년시절 만경향교에서 수학하시던 선생은 일제의 탄압이 날로 심해지자 비장한 각오를 품으시고 우리 강토에서 왜적을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는데 결사보국할 것을 결심하시고 한촌 선생의 발탁을 받아 박상진 총사령이 영도하는 광복단에 입단하셨다. 왜구와 매국친일배들을 처단하는 행형부에 배속되어 한훈 유장렬 등과 박곡 벌교 등지에서 과감한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오성지구에서 주둔하고 있는 일군헌병분견소를 습격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일군경과 매국노 다수를 사살하여 왜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그 후 선생은 일군경의 끈질긴 추적을 피하여 만주로 일시 피신하였다가 다시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하던 중 매국노 이종국의 밀고로 광복단의 중심인물인 박상진을 비롯하여 김경태 김한종 임세규 등이 왜경에 체포되어 사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이에 굴하지 않으시고 초지일관 생명이 다할때까지 분연히 싸울 것을 다짐하시고 남정관 김정화 등과 전열을 재정비하여 투쟁을 계속하였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맹활약을 하면서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내기 위하여 옥구 김덕장 김영순과 고창 고양진 김학규 등으로부터 자금을 조달받아 임정에 보냈다. 이 사실이 탄로되어 왜경에 체포되었다. 2년간 갖은 고문과 악형을 받으시며 재판에 회부되지 않은 채 투옥되었다가 1926년 3월 29일 전주지방법원에서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신 뒤 1929년 4월 1일 출옥하시었다. 출옥 후에는 왜경의 감시로 활동을 저지 당하시다가 1945년 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