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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용담에서 최제우교조에 의해 창도된 동학의 "인내천"사상은 조선왕조의 학정과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고에 시달리던 전라도 농민들에겐 희망에 찬 새로운 복음이었다.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도높은 깃발은 당시 억압과 수탈의 상징이었던 고부군어를 처부수고 백산기포(갑오 3월 21일)에 구름같이 모인 동학농민 혁명군의 대도창명이었다. 이 고장 출신 김덕명장군이 백산기포의 총참모로서 선봉장이 되었고 그분의 군호에 따라 우리들의 조상인 지역농민들이 손에 손에 죽창을 들고 동학농민군의 혁명대열에 앞장서 황토현에서 공주 우금치에서 마지막 원평항전에서 초개와 같이 목숨을 던져 싸웠으니 이 고장에 사는 오늘의 우리는 자랑스런 혁명군의 후예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게 된다. 김덕명장군은 동학의 전도로 중진인물(금구 대접주)로서 동학교조 신원운동의 참례집회와 금구 원평 집회를 주도한 민족종교운동의 선구자였다. 장군의 휘는 준상이오 자는 덕명이고 호는 용계다. 관향은 언양으로서 신라경순왕의 일곱번째 아들인 언양공의 29세손이다. 아버지 한기공과 어머니 파평윤씨의 장남으로서 본면 쌍용리 용계마을에서 1845년 을사10월 29일에 출생하였다. 향노들의 전언에 의하면 장군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6세에 사서삼경을 독파하였고 장골풍채에 담론이 유창하여 시리를 분멸하는데 막힘이 없었다고 한다. 동학농민혁명군이 홍토현에서 관군을 무찌르고 전주에 입성하여 농민의 함성이 호남평야에 포효하기까지 금구 김덕명포의 몰해 이 어느 과도었는가는 다음 몇가지 문헌을 통해 고증할수있다. "문헌명...", 상의 문헌으로 보아 전라도 동학의 중심지는 대도회소가 있었던 이 고장 금구원평이었음을 알수가 있고 금구 김덕명포의 총사였던 장군의 탁월한 지휘능력과 혁명가적 정치력량을 집작할수가 있다. 아세아의 정치판도를 바꿔 놓을 계기가 되었던 갑오 동학농민혁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