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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휘는 종희이고 호는 남정이다. 독립투사로서 망명지 중국에서 가명으로 위장한 이름을 다 알수는 없으나 기록에 나타난것을 보면 집중, 집중, 인홍, 종암등으로 사용하였으니 때와 곳에 따라 새로운 사명이 전개될때마다 바꿔진 이름을 볼때에 처절했던 항일투쟁사의 한 단면을 엿볼수가 있다. 장군의 관향은 전주이고 도평군의 18세손이며 바어지 태식공과 어머니 김해김씨의 장남으로 1890년 4월 19일 본면 구미마을에서 출생하였다. "망국지백성으로서 너의 재조와 사람된 그릇이 아깝다"고한 이 말은 장군의 은사 학담 최세현선생의 탄식이었다고 한다. 훤칠한 키에 재조가 뛰어났고 빛나는 안광은 만인을 제압할수 있는 장군감이었다고 지금도 마을 논로들은 이야기하고 있다. 누구보다도 의협심이 강했던 장군께선 미기3.1운동당시 일제의 잔인한 살인폭정을 목도하고 나라잃은 백성으로서 비장한 각오와 결심이 섰던것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2남 1녀의 어린자식들을 향리에 남겨둔채 만주땅을 찾아 이국만리 북풍설한속에서 파란만장한 장군의 한생애가 시작된 것이다. 1919년 조선의열단에 입단하였고 1922년 중국 상해에서 일군 전중의일 육군대장을 저격했으나 미수에 그쳐 실패하고 동지 2명은체포된채 장군은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였다. 1925년 중국 광동에 있는 홍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상해와 남경등지에서 치열한 항일투쟁을 계속하며 1938년 조선민족혁명당 창당중앙집행위원을 역임하였고 조선의용대 총무조장으로도 활동하였다. 1943년 광복군 제1지대장과 고급참모를 역임하였으며 1942년과 1944년 양차에 걸쳐 임시정부의정원 의원으로서 전라도대표로 활동하였다. 8.15광복을 맞아 1946년 3월 28일 임정요인들과 함께 귀국도중 선상에서 별세하니 1977년 12월 13일 국가에선 고인의 독립투쟁공적을 높이 찬양하여 건국훈장 국민장(547호)을 추서하였다. 몽상간에도 그리던 조국의 산하를 목전에 두고 귀국선상에서 불귀의 객이 된 장군의 죽음은 국가적인 손실이오 우리고장의 큰별을 잃은것이다. 장군의 유해는 장군이 어릴적 뛰놀던 구미마을 동산에 한줌의 흙으로 묻혀있다가 금년 5월 대전국립묘지로 이장하였고 장군의 생가는 구미마을에 그대로 남아있다. 장군이 가신지 40여년 만시지탄이나 학수재 노인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