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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이 누설되고 김상옥 열사의 의거 등 적의 주목이 요시찰 인물로 낙인된 선생에게로 집중되므로 더 이상 국내에 있어서는 대적항일이 불가능하므로 망명의 길을 떠나 중국으로 향하여 우선 북경에 정착하여 김창숙 신채호 이회영 선생들과 제휴하고 춘풍추우 기나긴 세월을 같이 하면서 국권회복과 자유혁명을 위해서는 아니해 보신 일이 없으실 정도로 투쟁하시는 과정에서 노장학파와 궤도이론이 비슷한 아나키스적 논리가 요청된다고 판단하고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와 대결해야할 입장에 있는 중국 국민혁명의 원로 오추휘 이석증과 동족의 원로인 이회영 선생을 비롯한 신채호 유자명 백정기 이을규 동지등과 협의하고 재중국 아니키스로 연맹을 조직하고 한수현에 양도촌 건설하여 최초 자치운동전개 남화한인청년연맹 흑색공포단 조직 1925년 6월 상해공단연합을 중심으로 대일 영총파업단행, 1927년 복건성 민단편련처 조직, 1928년 5월 일제배척운동 1929년 노동대학에 참가 1930년 10월 김좌진 장군 서거후 북만운동 수합지동주구배며 폭한들의 행패로 만주를 철수 1932년 11월 17일 이회영 선생의 순국을 계기로 친일주구배 숙청에 전력을 기우려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과 제휴하고 적극 격렬하게 공격태세를 취하여 수많은 밀정 숙청과 일제의 음모공작을 파괴하던 중 엄형순 등 열형동지들이 순국하고 육삼정의거를 일으켜 백정기 이강훈 원심창 동지들은 장기간 적의 옥중에서 신음하였다. 그뒤 77사건 발발로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통해서 유시평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과 협의하여 측면으로 상호 협조하였으며 또 광복군을 지원하다가 상상외로 일제가 돌연히 무조건 강복하여 8.15광복절을 마지하게 되었다. 8.15후에도 혁명사업의 뒷처리와 미진한 일을 청산키 위하여 수년간 중원대륙을 남북으로 종횡하면서 상해거류민단장과 인성학교이사장으로 교포의 구호와 교육에 주력하며 중국원로 오추위 등과 조선학전관 신채호학사를 설립하여 한국학연구의 길을 트고 사상계몽을 하시다 1954년 6월 영주귀국하였으나 인위적으로 갈려진 조국통일에 정열을 쏫고 영일이 없이 뇌심초사하면서 활동하던중 5.16군사 구데타로 옥고를 치루는 등 쓰라린 경험을 격으시며 반독재민주투쟁을 벌리는 등 여생의 일각까지 청렴고고한 지조를 지키는 형극의 길을 것다가 1981년 1월 21일 그렇게도 염원하시던 조국통일의 실마리도 찾지 못하신 채 86세를 일기로 한 많은 생애를 다하셨다. 선생의 휘는 현섭 자는 윤옥 호은 화암이다. 1983년 8월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로 받으시다. 오호라 선생의 생애는 의협선행과 솔선궁행으로 이사모의를 물리첫고 의분과 혈루로 얼룩진 장엄한 쾌거는 산하를 진동시키고 귀신도 감루를 흘리게 하였으니 그 공적을 백척풍비로도 다 표현할 수 없으며 더욱히 중국의 석학들과 한국학을 창설하고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