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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 모금운동본부는 7000명의 명단을 가지고 있는 금산사로 정한 다음 전국 미륵숭봉자 수백 만 명을 대리한 7천명의 전국총대 88명을 이끌고 모금한 돈을 전 내무부장관 백성욱 스님(당시19세)을 상해임시정부 자금전달자로 선정하여 1917년 삼만 여 원을 전내무부장관에게 1차로 송금하고 수차에 걸쳐 밀파했다. 그리고 1919 기미년 음 9월 19일은 만세운동으로 전신창이 된 애국지사들이 금산사 향로전에 모여 전국총대 88명을 모아놓고 외면적으로는 불공(마지) 또는 33본산 불사회의를 전제하고 내용적ㅇ으로는 군자금 조달 건국대표자대회를 했다. 그런데 일본 관헌들은 임진왜란때 뇌묵대사가 의승병 수천명을 이끌고 1593년 2월 12일 새벽 행주산성 싸움에 권율장군과 합세 왜병들을 패전시킨 보복으로 정유재란때 금산사 천여암사를 모조리 불질렀던 때와는 같지는 아나하였지만 전북일대의 헌병 경찰대부대를 이끌고 금산사 천여 완전 포위 총칼로 급습하여 88명 애국지사를 모조리 전주형무소 8호감방을 위시 연행 구타 고문등 비인도적인 해위를 하면서 독립운동의 조직체를 캐물었다. 그러나 거룩한 뜻을 품은 88명의 애국지사는 한사람도 빠짐없이 태을수 또는 미륵사상가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제사단자 단신수 교도의 종교적 행사라고 말할뿐 군자금 모금관계는 살아난 27명은 물론 병사옥사로 한과 원을 품은채 사라진 61명은 지사도 죽어가면서 끝내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때늦은 감은 있지만 국민 된 도의로서 이 엄청난 당시의 생생한 일본관헌의 수사기록을 정부관비로 번역한 독립운동사 자료집 제9집 임시 정부사 자료 중 473쪽~477쪽 1919년 12월 29일 제 36610호를 근거로 한 맺힌 구비구전과 함께 수백 만 후손들이 간직한 문헌 등을 종합 분석하여 태운 김형렬 선생 등 무명지사 포함 88애국지사 충혼실록을 발간하기에 앞서 1981년 12월 30일 대한민국 보훈청 건국포장 신청을 하고 모악산 기슭 한국미륵사상의 연원지 금산사 아래 태운 김형렬 선생 등 무명지사 포함 88애국지사충혼비를 세우니 후손에 길이 남기고 전하여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 지상미륵세계가 이루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