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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피보통학교(臨陂普通學校) 졸업 후 사립 구암영명학교(龜岩永明學校)에서 2년간 수업하고 서울에 와 대동인쇄주식회사에 다니면서 부기학교에 통학하였다. 1925년 5월 부기학 연구 목적으로 일본 도쿄로 건너가 츠카하라[塚原某] 경영의 춘양당(春陽堂)인쇄소에 고용되었으나 인쇄소가 폐쇄되어 1927년 9월경부터 일본인 가나자와[金鐸]가 경영하는 인쇄소 동성사(同聲社)에 취업하여 문선공(文撰工)으로 일하였다. 그는 이 인쇄소에서 주로 사상에 관한 문서를 출판하던 중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사상에 접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독립 실현의 수단으로는 먼저 노동자·농민의 조직체를 결성하고 그 단결력으로써 끊임없이 투쟁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갖기에 이르렀다. 1927년 11월 말경 전북 옥구(沃溝)의 이엽사농장(二葉社農場)에서 소작쟁의가 일어나자 동년 12월 일본 도쿄에서「친애하는 동향 제군에게 격함」이라는 제목으로,‘자본주의제도 아래 현대사회의 유산자 생활의 호사로움과 노동자 생활의 궁핍을 비교하고 그것이 착취와 압박을 능사로 하는 제국주의의 모순적 소산물로 단정’하면서 항일의식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격문을 작성하고 300매 가량을 인쇄하였다. 군산(群山)·강경(江景)·논산(論山) 등 비옥한 토지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가와사키[川崎]·오오쿠라[大倉]·척식회사(拓植會社)·불이회사(不二會社)·이엽사(二葉社) 등 자본가에 항거하고, 소작인은 농민조합을 조직하여 철저히 투쟁할 것을 촉구한 이 글은 국내의 신현국(申鉉局)·심상악(沈相岳)·심상호(沈相鎬)·황봉규(黃琫珪)·심호택(沈鎬澤)에게 발송되었고, 특히 신현국은 이엽사농장의 소작쟁의에 관련된 농민들에게 이를 배부하였다. 1928년 1월 일본 도쿄[東京]에서 김병우(金柄祐)에게 신간회(新幹會)를 중심으로 역량을 모아 항일운동을 전개할 것을 독려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30년 9월 부친의 사망을 계기로 옥구로 귀향하여 활동하다가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1931년 8월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4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