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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4월 25일 친구 박이환(朴 桓)·문형모(文亨模)와 거의할 것을 맹약하고, 1906년에서 1907년 10월까지 거사준비를 하였다. 즉 박이환의 형인 박영환(朴永桓)으로부터 군자금을 받아 총기 3백여 정과 탄약 20여 되, 그리고 군도 50여 자루, 화약 10여 되를 준비하고 의병 2백여 명을 소모하였다. 1907년 11월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257명의 병을 거느리고 11월 15일 고산 가금리(高山 柯琴里)에서 적과 첫 접전을 벌여 29명을 사살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그후 진안(鎭安)·장수(長水)·용담(龍潭) 등지에서도 적과 접전하여 적 44명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적의 의병대 소탕전으로 인하여 전력이 크게 쇠퇴하여 1908년 4월 21일 부득이 의진을 해산하였다. 1918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활동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