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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 의병장 연안 이공 휘 보 충혼비문 옛 사람이 이르기를, "어버이를 섬기는 데에 효도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임금을 섬기는 데에 충성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 따라서 오직 효도이기 때문에 능히 공경과 정성을 다해야 하고 오직 충성이기 때문에 의가 있는 곳에 능히 목숨을 바치야 한다고 하였다. 살피건대 여기에 그 막대한 효도와 막상한 충성을 다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연이의 계출로 통선랑에다 사헌부지평을 추증받은 寶(보)라고 일컫는 인물이 그 분이시다. 공께서는 서울 태생으로 중종 39년 갑진(1544)에 아버지 연화공과 어머니 안동권씨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겨우 14세의 어린 나이로 失怙(실호)의 설움을 안은채 어머니를 모시고 외척의 연고를 찾아 익산 땅으로 낙남하다. 천성이 慷慨(강개)하고 지기가 강건하여 細微(세미)한 일에 속박받지 않으며 7남매의 가장으로 각고 끝에 집안을 일으키는 한편 주경야독으로 남모르는 사이에 선비다운 風貌(풍모)와 내실을 갖추어 사림들의 중망도 사셨다. 편모의 시봉에 성효를 다했고 동기들의 장래를 위하여 서울의 대방가의 문하로 유학을 보내 크게 학문을 이루고 큰 인물이 되도록 뒷받침하여 대성을 거두었다. 다시 말해서 어머님에겐 길이 천수를 누리며 끝까지 영귀를 보시게 했고 동기들에겐 한 나라를 질머질 棟梁(동량)이 되게 했다는 것이다. 운명의 시기였던가, 불행하게도 임진왜란이 터졌다. 불과 20여 일만에 나라가 결단이 났다. 도성을 내주고 임금은 허둥지둥 파천 길에 올랐다. 실로 위급 존망지추였다. 팔도를 짓밟은 왜적의 발길이 마침내 곡창을 노리고 호남으로 향했다. 공께서는 금산과 전주 사이의 梨峙(이치)에서 왜적을 맞아 뜻을 같이 하는 400여 명의 의병을 지휘하며 마치 관군의 패배라도 만회하려는 듯이 돌진하여 구적들을 몰살시키려다가 중과부적으로 마침내 임진년 8월 27일에 장렬히 순절하니 향년 48세이셨다. 아아! 보다 앞서 조국의 운명에 悲憤慷慨(비분강개)했던 공께서는 병기와 군량을 마련하고 의병을 모집하던 시초부터 이미 죽음을 각오하였고 또 이미 죽을 자리를 지점해 두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허리띠에다 표시까지 하고는 주위의 간절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왜적의 殲滅(섬멸)을 위해 돌진했던 것이다. 그래서 장렬한 최후를 맞은 것이다. 조헌, 곽재우 등 당일의 유수한 의병장과 더불어 그 위대한 충혼에게 찬사를 보내자면 그 사연은 말로도 다 드러내지 못하리라. 거듭 이르건대 공께서는 어버이를 섬기는 데에 그 효성을 다하였고 임금을 섬기는 데에 의를 찾아 목숨을 바친 것이다. 이 얼마나 지효지충한 인물이 아니던가! 은천사의 봉안이며 綽楔(작설)의 포상이 있었지만, 그래도 미흡하여 孱孫(잔손)들의 미성을 모아 정민을 다듬어 충혼비를 세우오니 부디 위안 거리로 삼으고무한한 명복을 누리소서. 공의 가계는 가까이에 모셔진 묘갈로 미루고 생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