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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시 수우재에서 태어나다. 천성이 어질고 순직하며 효성이 돈독하여 집안 어른들로부터 칭찬을 받으며 자라나다. 사숙에서 한문과 글씨쓰는 법을 독공하고 관립한성사범학교 재학 중 주시경 선생이 지도하는 조선어강습원을 수료하다. 학교를 졸업하자 보통학교 훈도로 발족하여 일제의 강박한 환경에서 한글을 위시 한시조문학과 가악을 연구발표하고 이를 계몽하였으며 많은 저술로 우리나라 문학에 이바지한 공적은 호번하여 이에 줄이거니와 교육계의 원로로서 각급학교 교사를 역임한 후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국내 여러 대학교 교수와 전북대학교 문리과 대학학장으로 많은 학자를 길러내고 향토문화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다. 교직의 어려운 생활에서 희귀한 고서적을 수집하여 4천3백여권을 서울대학교에 기증하다.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인 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고향에 돌아와 우울한 나날을 보내다 한평생 쓴 일기는 당시 우리 문학계의 동태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문헌이다. 학술원 공로상을 받고 회원이 되다. 명예문학박사 학위가 수여되고 문화포상을 받다. 1977년에는 건국포장이 추서되다. 1957년 10월 9일 한글날 기념식에서 축배를 들고 귀가 도중 계동 골목에 쓰러져 풍증으로 고생하다가 1968년 11월 29일 상오 1시 50분 음력 무신 10월 10일 축시 향년 70세로 수우재에서 별세하니 수우재 뒷동산 신좌 언덕에 장사하다. 부인 광산 김씨는 영서의 딸로 사계 김장생의 후손이다. 1892년 음력 임진 12월 3일 논산 군두마면 은동에서 태어나 나이 15세때 음력 12월 5일 선생과 결혼하여 눈물겨운 살림에서 정성어린 내조의 공으로 가람문학의 꽃을 피게 하다. 부덕을 쌓아 향당에서 여중군자로 우러르다. 아들은 동희 경희 종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