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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이조 명신 가정대부 한성 윤 휘 의지의 제16세손 사과수성의 장자로 서기 1889년 기축에 상엽에서 탄생하니 명 규선 자 일환 본관 청풍이다. 천자가 영특하고 의협심이 출중하여 근동의 촉망대상이었다. 일찌기 한문수학하며 청운에 뜻을 두었던중 경술국치의 비보는 모든것을 격변시켜 통분을 가누지 못하여 논산군 채운면 용화리로 일시 이거하였다. 거기에도 왜인은 가까이 있어 일상 그들과 충돌은 그치지않아 인근까지 알게되었다. 국권회복의 기회만을 기도하던중 서기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은 천재일우의 호기였다. 공은 내응한 영동군 매곡면의 안공덕 장복철 임춘봉 평남 개천 길영순동지는 물론 송재기 이근석 이근오 양촌면의 장만식등 많은 동지는 3월 20일 국내 3대 시장인 강경장날을 택하여 궐기할것을 모의하고 손수 태극기를 제작하여 당일에 인근 친지와 나기창등 동민 태반은 장꾼으로, 태극기는 상품으로 가장하고 시장에 잠입 하오 늦게 옥녀봉에서 태극를 나누어주며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니 근만여명의 장꾼들은 삽시간에 합세 작열하는 거대한 불덩어리가 되어 만세를 절규하니 가히 강경벌도 흔들릴듯한 기세였다. 겁에 질린 왜적은 당황하여 평화의 군중이 지극히 정당한 국권회복을 외치는 거룩한 행진을 잔인무도하게 일언의 경고도 없이 총격하며 급습하므로 할수없이 밀리던 중 눈앞에 금강 샛강이 가로막혀 진퇴양난이라. 많은 동지들이 이때 피체되었으나 공은 태극기의 노도를 지휘하던 움켜진 농기장등을 강심에 꽂고 힘껏뛰어건너므로 위기일발 호구를 탈출하고 각처를 암약하며 재봉기를 획책하다가 강경서에 피체되여 구금 매일 거사동지의 명단을 추궁당하여 한사 거절하다 못해 감방에서 자결을 기도했다가 간수에게 발각되여 미수로 끝났다. 그후에도 줄기차게 혹독한 고문을 당하던 어느 무더운날 왜경을 격분 일격 쓰러져 노출된 그의 배꼽을 꽉물어 뜯었다. 그 뒤는 불문가지로 공은 결국 실신하였다가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