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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철원군 철원읍 중리 224 독립운동가 박용만 선생 생가터이다. 하지만 비닐하우스 이외에는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박용만(朴容萬, 1881~1928)은 1881년 강원도 철원에서 출생하였다. 1897년 독립협회에 참가하여 활동하였고, 1904년 보안회 간부로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항거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뤘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1908년 7월 미국 덴버시에서 애국동지대표회를 열었고, 1910년 6월 네브라스카 헤이스팅스에 한인소년병학교를 열어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1911년『신한민보』주필, 1912년『신한국보』주필로 활동하였으며, 1912년 1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 북미지방총회대표로 참가, 외교원에 선임되었다. 1914년 6월 하와이 오아후에서 대조선국민군단을 결성하여 단장으로 사관학교를 운영하였고, 1917년 뉴욕에서 개최된 소약국동맹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한 바 있다. 또 1919년 3월 하와이에서 대조선독립단을 조직하고「태평양시사」를 간행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중국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총장에 선임되었다. 1921년 중국 북경에서 군사통일회 개최를 주도하고 1922년 천진에서 대일무력투쟁을 호소하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1923년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여 창조파로서 활동하면서 1924년 창조파 중심의 인사들이 설립한 한국독립당의 비서장에 선임되는 등 독립운동의 탁월한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1928년 베이징에서 의열단원 이해명(이구연)의 습격을 받고 살해되었다. 정부에서는 박용만에게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