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page


9page

유재만지사 1882년 안흥리 출생, 1907년 김인성의병부대에 들어가 양주, 연천등지에서 투쟁을 전개하다가 1908년 일본군에 잡혀 3년간 옥고를 치루었다. 송창근지사 1888년 상장동 출생, 1908년 윤인순의병부대에 들어가 활동중 1910년 일본 헌병에게 잡혀 3년간 옥고를 치루었다. 육자상지사 1870년 지향동출생, 황재호의병부대에 들어가 투쟁을 전개하다 1909년 일경에 잡혀 3년간옥고를 치루었다. 우병창지사 1886년 보산리출생, 1909년 홍워유부대에 들어가 양주지방에서 투쟁을 전개하다 1911년 일본군에 잡혀 3년간 옥고를 치루었다. 김병기지사 1850년 보산리출생, 의병에 투신,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1903년 9월 의병 장 임병찬 , 이인순, 전유규등과 새로운 항일독립운단체인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활동하다 1904년 5월 일본경찰에 잡혀 옥고를 겪었다. 김병주선생 1884년 보산리출생, 1907년 김인성의병부대에 들어가 양주, 포천, 적성등지에서 활동중 일경에 잡혀 모진 고문으로 출옥후 사망하였다. 이명기선생 1881년 답동출생, 1907년 연기우의병부대에 들어가 양주, 포천, 적성등지에서 활동하다 1910년 일경에 잡혀 많은 고초를 겪었다. 김병원선생 1882년 보산리출생, 1908년 김인성의병부대에 들어가 양주, 포천, 적성등지에서 투쟁을 전개 많은 고초를 겪었다. 이병하선생 1973년 탑동출생, 1908년 정용대의병부대에 들어가 양주, 포천, 영평등지에서 투쟁을 전개하다 1910년 일경에 잡혀 심한 고문을 당해 불구로 생을 마쳤다. 김병우선생 1891년 보산리출생, 김인성의병부대에 들어가 양주, 포천,적성등지에서 전목기, 유재만등과 같이 투쟁을 전개 많은 고초를 겪었다.
9page

홍병준선생 자 덕문, 1864년 보산리 출생, 1919년 음 2웕 25일 동두천 장날을 택하여 기미독립만세운동을 주도, 천여군중을 지휘하다가 일본헌병에 잡혀 옥중에서 도 독립만세를 불렀으며 6개월간의 옥고끝에 출옥 심한 고문여독으로 생을 마쳤다. 이 만세운동에 참가했던 당시 배재학생 정원이와 한원택, 박창배, 박경필, 박영철, 고복돌등 6명의 청년은 모진 태장을 맞고 풀려났다. 육연욱지사 1915년 지향리출생, 1940년 6월 중국으로 건너가 광복군에 입대, 특수훈련을 받고 상해등지에서 왜적의 무리들과 투쟁하다가 1944년 8월 일경에 잡혀 북경형무소에서 1년 4개월간 옥고를 치루어다. 황용호지사 1881년 광암리출생, 1921년 4월 평양에서 중국 임강현에 본부를 둔 항일무장운동단체인 백산무사단에세 활동하병 일경에 잡혀 고초를 겪었다. 이처럼 생사를 초월하여 왜적과 싸운 선열들의 애국의병투쟁사와 그 공훈을 회상함에 있어서 만시지탄이 없지않으나 조국광복을 위해 몸바쳐 온 향토선열들의 고귀한 애국혼과 3.1독립운동정신의 그 유훈을 긱리고자 추모비를 건립하여 역사의 장으로 후대에 물려주려는 것이다. 이를 계길 우리 후손들에게 국난극복과 조국광복을 위해 생을 바치신 향토애국선열들의 숭고한 민족정신과 애국혼을 계승시켜 한국인의 기상이 드높여직 될것이다. 역사를 통해 역사를 배우지못하는 민족은 살아남지못핟나는 교훈을 되새겨야함이 우리들의 국민된 자세로서 변화무쌍한 국제정세의 북확실성속에서 주변국가들의 국일에 따라 영원한 적도 없는 오월동주의 냉엄한 현실상황에서 우리 스스로를 지키고 대를 이어갈 후손들에게 애국애정의 정신을 함양하는 영원한 산교육의 장으로 남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