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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은 옛부터 수많은 외세의 도전과 왜적의 침략을 받으면서도 은근과 끈기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의연하게 5000년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보존시켜왔다. 그것은 오로지 민족자존의 의지와 인본사상에 뿌리를 둔 민족정신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정신은 일제 36년간의 모진 시련과 탄압속에서도 분연히 일어나 잃었던 조국을 되찾는 원동력이 되었다. 우리는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였고 이제는 당당한 주권국가로서 힘찬 발전을 거듭하여 경제부국으로서 세계의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있다. 이때 조국과 민족을 수호하기위해 일제에 대항하여 순국하신 선열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추모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러나 우리들은 현실에 안주하여 선열들의 피로 아로새긴 순국이념과 고귀한 독립정신을 망각하는 경우가 있었음은 실로 통탄할일이 아닐수없다. 그 옛날부터 절의문화가 꽃피워온 우리들의 향토 동두천에도 살신성인한 애국지사들이 있었으니 1905년 을미조약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체결되자 국권회복을 부르짓으며 의열로 일어섯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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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송천 김연성의사, 1870년 5월 5일 보산리출생, 자 범일, 관은 성균관박사, 황순일의 권유로 의병에 투신 1907년부터 의병장으로 양주, 포천, 영평, 가평, 연천, 적성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08년 부대를 확대편성하여 200여명을 이끌고 투쟁하다가 일본군에 잡혀 처형당하였다. 추삼만의사 1881년 하봉암리 출생 1907년 황재호의병부대에 들어가 활동하던중 이재학의병부대로 옮겨 양주, 적성, 삭녕딜대에서 투쟁중 친일파 일진회원인 김영덕과 이승녕을 처단하였다. 그후 일본군에 잡혀 1910년 1월 5일 처형당하였다. 홍희영지사 1881년 외보산리출생, 1907년 황순일의병부대에 들어가 양주,포천일대에서 투쟁을 전개, 1908년 일본군에 잡혀 5년간 옥고를 치루었다. 정두환지사 1880년 안흥리출생 1907년 정대용의병부대에 들어가 투쟁을 전개, 1909년 의병장 정용대가 잡힌후 1910년 9월에 홍원유부대에 가담 투쟁중에 일본군에 잡혀 5년간 옥고를 치루었다. 정충환지사 1888년 송내리출생 1908년 5월 12일 황재호의병부대의 동료 80여명과 함께 무장을 하고 투쟁에 필요한 군수품을 조달하고 포천 덕둔리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일본군에 잡혀 5년간 옥고를 치루었다. 전순만지사 1879년 강봉암리 철동출생, 1907년 황재호의병부대에 들어가 양주,적성일대에서 투쟁을 전개하다가 1908년 10월 일본군에 잡혀 5년간옥고를 치루었다. 정제환지사 1878년 안흥리에서 출생, 1908년 연기우의병부대에 들어가 연천, 삭녕등지에서 활동중 1909년 일경에 잡혀 5년간 옥고를 치루었다. 전목기지사 1881년 창말에서 출생 , 1907년 김인성의병부대에 들어가 양주, 정성등지에서 투재쟁하다 1908년 일본군에 잡혀 3년 옥고를 치루었다. 이긍래지사 18883년 광암리출생, 1908년 정대용의병부대에 들어가 양주, 포천, 적성, 영평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10년 일본군에 잡혀 3년간 옥고를 치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