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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리 향토출신 의병으로 단양인 우병창 선생 정선인 전순만 선생 동래인 정충환 선생 광주인 정두환 선생 사천인 목자상 선생 여산인 송창근 선생 문화인 유재만 선생 광주인 이긍래 선생 정선인 전목기 선생 추계인 삼남열사 남양인 홍희영 선생 광주인 정제환 선생 벽진인 이명기 선생 전주인 이병하 선생 등 이렇듯 잃었던 나라를 되찾기 위해 부고부모처자하며 국내의거에 몸바침은 물론 이역만리 중국 등지에서 모진 설한 속에 풍천노숙하면서도 왜구의 무리들과 당당하게 맞서 싸운 사천인 목연욱 평해인 황용호 선생 그 분들이 어떤 자신의 영화를 위함이던가 아니면 생명의 고귀함을 몰라서였던가. 지나온 세월을 헤아려 끼친 자취를 더듬어보니 풍진세파속에 분묘는 황폐된 채 말이 없고 담장은 허물어져 가슴만 뭉클하다. 후손마저 영조몰락하니 어찌 통탄치 않으랴. 나라에 충성한 선열들의 공훈이 이처럼 출중한데 어찌 부끄럽고 죄스럽지 않으랴 교육이란 무었이며 문화란 무었인가 또 예절이란 무었인가 우리 고향이 낳은 훌륭한 선열을 받들지 못한다면 교육은 의미가 없고 문화는 퇴보할 것이며 예절은 그 기강을 잃을 것임이 너무도 자명하다. 이제 만시지탄이 없지 않으나 해방 50년을 맞는 이때 강릉 김씨 판윤공파 동두천 종중 「회장금연상」 첨의로 조국광복을 위해 공헌한 향토선열들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추모를 건립하는 것은 우리 고향의 자랑이요 긍지가 될것이며 이 비를 통해서 그 분들의 정신과 정기를 체득하고 계승케 하여 후인의 귀감이 되며 그 얼이 후대에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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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1914년 5월 독립의군부 동지들과 함께 일본경찰에 잡혀 고초를 겪었다. 김병응 선생 1872년 6월 5일생 1950년 10월 12일 졸 자 문선 강릉인 학인의 자 농사를 짓다가 1908년 김연성 의병부대에 들어가 양주 포천시 연천군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김병주 선생 1884년 6월 8일생 1909년 3월 15일 졸 자 경륜 강릉인 학인의 자 농사를 짓다가 1908년 김연성 의병 부대에 가담 양주 포천 적성군 일대에서 활동중 일군에게 잡혀 많은 고초을 겪고 풀려나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김병시 선생 1891년생 자 문생 강릉인 학인의 삼자 농사를 짓다가 1908년 김연성 의병부대에 삼형제가 모두 가담하여 양주 포천 연천 적성군 등지에서 의병투쟁을 전개하다 많은 고초를 겪었다. 김병원 선생 1882년 10월 2일생 1962년 11월 23일 졸 자 공필 강릉인 학영의 자 농사를 짓다가 1908년 김연성 의병부대에 들어가 양주 포천 적성군 일대에서 의병투쟁을 전개하다 일군에 잡혀 많은 고초를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