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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성은 경기도 양주 출신으로 1907년 9월 창의하여 경기도 양주·적성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1월부터 이강년의진의 의병소모관을 역임하였고, 1909년 1월부터는 관동창의원수부의 중군장 이은찬의진에 속하여 경기·황해도 일원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강년은 1896년 1월 11일 문경에서 창의하여 유인석의진에 참가하여 유격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07년 3월에는 재봉기하여 강원도와 충청도, 그리고 경북 북부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이강년은 1908년 8월 한국 군대의 해산 이후 40여 의병진의 추대로 도창의대장이 되어 충청도와 강원도, 그리고 경상도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1월 13도창의대진소의 호서창의대장으로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였다. 이은찬은 1908년 3월에서 4월 사이에 결성된 관동창의원수부의 중군장이었다. 관동창의원수부는 임진강 유역과 양주를 중심으로 하는 경기도 동북부지역에 결성된 연합의병부대였다. 이 연합의병부대는 1908년 1월 13도창의대진소의 서울진공작전이 무산된 뒤,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했던 군사장 허위를 비롯한 일부의 의병부대로 결성되어 임진강 유역과 양주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08년 6월 총대장 허위가 체포된 뒤, 이은찬은 중국으로 망명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동년 10월부터 포천·영평·마전·적성 일대에서 각처 의병 부대와 연합하여 활동하였다. 이은찬이 1909년 3월 말 체포된 뒤 그 휘하 부대장들은 경기도 일원에서 독자적인 의병 부대를 편성하고 항쟁하였다. 김연성은 1907년 9월 창의하여 동년 12월까지 경기도 양주·적성 등지에서 부하 30~40명을 이끌고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1월 13도창의대진소가 결성될 때, 김연성은 진동창의대장 권중희의 휘하에서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서울진공작전이 무산된 뒤 1908년 1월 이강년의진에 합류하여 의병 소모관을 역임하였으며, 1909년 1월부터 김연성은 관동창의원수부의 중군장 이은찬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이리하여 김연성은 1909년 1월부터 동년 4월 이은찬이 체포될 때까지 경기·강원도·황해도 일대에서 일본군 헌병분견소 습격 및 군자금 모집 등의 의병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09년 11월 29일 평양공소원에서 교형을 받아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