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page


61page

피체되어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르셨다. 이후 농토를 매각 광복단자금을 충당하였고, 1916년 다시 만주에 망명 김좌진, 노백린 장군 박상진 채기중 의사 등과 결교하며 활동하던 중 1918년 동지 규합과 군자금 조달차 밀입국하였다가 또 피체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르셨으나 곧 만주로 망명하셨고 1921년 다시 밀입국하여 광복단의 군자금조달 활동을 펴다가 체포되어 무기징역의 언도를 받고 공주형무소에 복역 중 십지에 죽침 등 혹독한 고문을 당하여 거의 반신불수가 되신 채 출옥하셨다. 1925년 이후 서울 왕십리, 신설동 등지에 은거하며 국내 독립단체의 연락처를 제공하기도 하고 상경하는 본향청년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독립투사 비밀기술원에서 의술을 습득하셨다. 총독부로부터 관직을 미끼로 한 교묘한 회유를 여러번 받았으나 단호히 거절하시고 신설동에 한약방을 개설하여 빈곤한 주민들을 무료로 진료하셨다. 그러나 잦은 옥고로 건강을 잃어 오매불망 기원하던 조국 광복을 1년 여 앞두고 1944년 7월 3일 향년 54세로 졸하시니, 오호라 사로는 선생의 원통하신 혼을 슬퍼하고 공으로는 국사를 잃어 통곡하도다. 그러나 집보다 나라와 겨레를, 나보다 남을 위해 충절과 자혜의 생애를 온전히 사시어 독립유공표창과 건국포장의 국가 상전을 두 번 받으시니, 그 남기신 뜻과 드리우신 빛은 후세에 길이두고 전범이 되시리로다. 배위 청풍김씨는 중암 선생의 손녀로 성행이 단숙하시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