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page


48page

선생은 경주인이니 성은 이씨요 휘는 규채며 호는 우정이시다. 외에도 동아, 경산, 공삼 일명 규보이다. 이조 말엽 국내 정세가 몹시 어지럽게 되면서부터 민족의 각성을 촉구하는 각종의 정파 사회 교육단체 및 언론기관이 생겨날 무렵 선생은 청성학교에서 후배교육에 힘쓰다. 1910년 이른바 한일 치욕적 조약이 체결됨을 계기로 선생은 분연 교육계에서 물러나 한학과 서예에 정진하면서 때를 기다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여기에 가담하였고 창신서예연구회를 창설하여 회장으로 취임 남녀학생을 상대로 비밀리에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일경에 의한 발각으로 1921년에 중국 상해로 망명하다. 1923년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피선되다. 1928년에는 당시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한 통일전선을 저해하려는 분열분자들을 배제하고 김구 안창호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조직 민족진영의 결속을 위하여 크게 활약하니 군사부 참모장및 총무위원장으로 피선되다. 1932년에는 이청천 오광선 장군과 함께 한국독립군을 지휘하여 큰 공을 세우시니 광복전선에서도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1934년 상해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다음해 서울로 압송되었고 10년간의 옥고를 치루게 되니 통재라 만리타향 이억땅에서 풍양노숙 온갓 신고를 겪으면서도 오로지 조국광복에의 일편단심이 이에 중단되다. 그러나 출옥후에도 항시 일경의 감시하에서 구국광복을 염원하면서 생전 효도를 미처 못할 모친의 묘하에서 조용히 3년 시묘에 정성을 다하다 선생은 8.15광복이후 정계일선에서 국개재건을 위하여 동분서주하면서도 성조 단군전 봉건사업과 대종교 남도본사 선범을 비롯 총본사정의참의원으로서 활약하는 한편 언론계에서도 관여하다. 신탁통치 반대 국민 연맹 위원직과 미소공동회의대책 국민대표위원 그리고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회장으로 큰 공을 세웟으니 진실로 선생은 한평생 세욕적인 부귀나 영화를 희구하기 보다는 나라위한 충의에 살면서 천추대의를 만천하에 밝혔으니 과연 민족적 지도자로써 건국의 초석이 된 분이다. 문무를 겸비하고 충효가 불이하며 정교가 일여한 선생은 너무나 덧없이 귀천하니 국민의 사모지대의를 만천하에 밝혔으니 어이 금할 수 있으랴 정부에서도 선생의 위업을 기리는 뜻에서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서기 1982년 8월 일 문학박사 다운 원흥균 찬, 김용진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