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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전공했다. 나라에 돌아와서는 인재 양성이 큰 임무라 생각하고 힘을 후생교육에 기울였다. 나라가 광복되자 공은 민주의원의원 입법위원의원 제헌국회의원에 선출되여 건국대업에 참획하였고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 1948년 12월 파리에서 개최된 제3차 유엔총회에 한국수석대표로 참석하여 공산진영의 맹렬한 반대를 물리치고 대한민국 승인을 얻어 찬란한 공적을 거두었다. 1949년 1월에는 초대 주미전권대사가 되여 건국초기 국제외교의 기초를 닦았고 1950년 6.25 남침을 당하자 불면 불휴 동분서주 기민 과감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여 유엔군의 급속한 출동을 얻어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던 조국의 위기를 모면한 것은 대한민국 역사상 불멸의 금자탑을 세운 것이라 하겠다. 공은 다시 1951년 가열한 전쟁 속에서 국무총리에 임명 되여 난마같이 어지러운 국정을 수습하여 전쟁에 크나큰 도움을 주었다. 1952년에 한때 야인이 된 공은 민주주의가 위기에 떨어지고 일당독재가 형성되어 가는 것을 앉아서만 볼 수 없게 되었다. 해공 신익희 유석 조병옥 박사 동지와 함께 민주당을 창건하여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아 부통령에 당선되였다. 슬프다. 1960년에 3.15 부정선거가 감행되자 공은 국민의 선두에 서서 항거분투하였고 4.19 혁명후에는 7월 29일 총선거를 거행하여 내각책임제 국무총리로 민국의 정권을 장악하였다. 공은 민주정치를 수립하고 경제제1주의를 표방하여 불철주야 심혈을 경주하던 도중 뜻밖인 5.16 사태로 큰 경륜을 펴지 못한 채 정치에서 물러나 두문불출 민족의 번영을 위하여 옥같은 마음으로 기도와 신앙에 살다가 숙환으로 장서하니 깨끗한 교육자요 근엄한 종교인이요 불굴의 정치가의 생애는 천주의 부름을 받아 하늘 높이 흰 구름은 탔던 것이다. 공은 1921년 8월 28일 성 프란시스코 제3회에 입회하여 1922년 9월 24일 회원명 프란시스코가 되고 1925년 7월 한국